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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5주일 2011년 7월 1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8 조회수435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5주일 2011년 7월 10일

 

마태 13, 1-9. 이사 55, 10-11.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비유하여 즐겨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농부가 밭에 씨 뿌리는 일에 비유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 비유 말씀을 회상하면서 그들 자신은 과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가를 반성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지만, 당신 스스로는 실패자가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뿌렸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무위(無爲)로 끝난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은 그들이 별도 종교집단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고향의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언행에 차차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당국이었고, 그 제자들을 내어 쫓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들은 안식일 다음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모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 대해 합께 회상하고, 그분이 하신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초라한 집회였지만, 오늘 주일 미사의 기원입니다. 그들에게는 건물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그들 중 주거(住居) 공간을 여유 있게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예수님이 가르친 대로 서로 섬기며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집회에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한 바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나눔이 발전하여 오늘 우리 미사의 말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식사가 형식을 갖추어 오늘 우리 미사의 성찬전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미사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제물봉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메시지가 담긴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불행히도, 율법과 제물봉헌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삼아 사람들을 단죄하는 잣대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구실로 사람을 단죄하고, 사제들은 제물봉헌을 빌미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단죄하게 하는 명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가 4, 19) 일입니다. 신앙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여, 자기 한 사람 죄인이 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 사로잡힌 이, 눈먼 이, 억눌린 이들”(4, 18)을 위해 은혜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시기에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실천을 합니다. 그 실천으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루가 6, 21-21)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잔치는 베풀어진 것을 참여한 모든 이가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기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과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신앙은 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강요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를 잃은 양들과 같이 측은한 군중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9, 36). 인간의 슬기로움은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고, 기를 꺾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이 슬기롭고 똑똑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셨다.”(마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돌아가셨듯이, 초기 신앙 공동체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들이 뿌리는 말씀의 씨는 좋은 땅을 만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바울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로마 4, 18)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권위도, 허세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은혜로움을 스스로 실천하여 자기 삶의 현실로 만듭니다.

 

신앙은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사람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깨닫게 하는 말과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하실 것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비옥한 땅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55, 10-11)는 말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야 만다.’ 예수님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우리가 뿌리면. 그것은 무위로 끝나지 않고,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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