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0 | |||
---|---|---|---|---|
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09 | 조회수30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23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오늘 복음 말씀 중간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친절한 해설까지 소개되지만 예수님은 분명 이 비유를 통해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의 내용은 그 자체로는 그냥 이야기하나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운좋은 씨앗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우리는 눈에는 분명 풍성한 열매가 눈에 들어오고 그 좋은 결과가 어떻게든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바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이야기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예언을 이야기 하시며 백성들의 상태를 더욱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해설을 들은 입장에서는 이 비유가 어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대한 비유이니 말입니다. 우리 역시 이 비유에 맞추어 우리의 모습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좋은 강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전해야 하는 입장에선 사람들은 강론이나 설교의 중요성을 그 어느때 보다 더 많이 요구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강론을 찾아 움직이고 좋은 신앙의 유산이나 볼거리를 찾아서도 수시로 움직입니다. 이런 관심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란 앞선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도 많이 읽었고, 좋은 강론도 판단할 귀를 가졌기에 예수님의 걱정은 많이 해소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대상이 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을 배우고 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깨달음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이 비유을 그 물가에서 들었던 이들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전해 들은 것이나 공부한 것을 읊어주는 것도 아닌 예수님이 바로 당신의 입으로 가르치시는데도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어려웠을까요? 예수님의 해석을 들은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부족함은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똑같은 귀를 가지고 누구보다 하느님께 성실한 종으로 살아온 이들이 들어도 보아도 가망없는 상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도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그 심각한 상태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 근원은 의외로 쉬운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모진 조건 속에서 씨앗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백성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 속의 땅들은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모습을 너무 자세히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 그는 세상의 유혹이나 이치라고 말하는 질서 속에서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신의 뿌리가 되지 못한 사람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겪게되는 수고와 희생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됩니다. 안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 마음이 너무 메말라 버립니다. 하느님의 이치를 알고 품었다 하더라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은 결코 그 끝에 달리는 열매,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늘 시달리는 모습과 행복해지려 아둥거리는 모습으로만 살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에 대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고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주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란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깨달음이 없는 이들이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하느님을 믿는다 말하고 성당에는 열심히 다니겠지만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질서는 바보같은 행동이 되고 전혀 생각지도 않게 됩니다. 혹 하느님의 이치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어떠한 이유로든 할 수 없다는 핑계 속에 결국 하느님을 피하는 것이 편한 삶이라는 자신을 위한 위안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는 삶의 고통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주시는 보기좋은 은총과 신기한 능력을 구경하고 그 요행을 삶의 이기적인 재물로 요구하는 사람들로 변할 뿐입니다. 그렇게 변해버린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란 들어도 의미를 깨달을 수없고, 보아도 보이는 것에 대한 놀라운 감탄 밖에 도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변할 것을 주문하는 가르침에도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만이 유일한 할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을 보고 듣기 위해 온 것일까? 예수님의 고민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말씀의 모습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비유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겁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시는 말씀은 그런 오해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진실을 보는 사람들, 듣는 사람들이 맺는 결론은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전하며 애태웠던 수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하느님의 진실을 보고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마음으로가 아니라 온 삶을 통해 보고 함께 하며 깨닫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예수님을 이해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삶으로 그분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기에 이 비유의 좋은 땅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모든 것은 어려움일 수 없었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듣는 그대로 그들에게 가르침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비유도 들었고 그 비유의 해설도 주님께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여러 모습의 땅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반성을 자아내고 있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일입니다. 더욱이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 들어서는 단 한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우리 모든 삶을 예수님으로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 말씀이 어떤 시기와 상황에도 우리 삶의 기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멈추게 하고 이기적으로 만드는 모든 유혹과 어려움에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나의 행복을 나누는 어려운 문제들이 모두 틀렸음을 알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백명, 육십명, 서른명이라면 그 자체가 우리가 서 있는 천국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