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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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11 | 조회수32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ㅡ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무서운 예수님의 말씀이 폭풍처럼 휘몰아칩니다.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첫 말씀들은 섬뜩할 정도로 강한 기운이 한가득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 칼이라니 이 말씀만 떼어서 들으면 도저히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가장 가깝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갈라서고, 원수가 된다고 하시니 도대체가 격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예수님의 격하고 강한 말씀은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곧 피로 맺어진 가족들에게 조차 우선순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너무 심하신게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야말로 질투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말씀이 이어지면서 이것을 우리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시기와 질투라고 말하기에 내용이 조금 이상하게 변화합니다. 하느님 외에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본보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냥 당신의 죽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십자가가 고통스런 벌이 아니라면 그 십자가에는 생명을 걸어야 할 목적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 구원이 목적이었듯이 말입니다. 제 십자가란 자신이 생명을 걸어 사랑하는 삶을 뜻합니다. 자신의 상황에 자신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만 그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각오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오는 영광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 대목에서 제 십자가를 지라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의 이기적인 사랑에 대한 중화작용으로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사람에 대한 찬미나 찬양을 받고 싶어하시는 욕심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고, 우리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우리를 이미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 속에 초점은 분명 사도들의 발걸음의 이유를 설명하시는데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움직이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가치를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모든 인간적인 관계를 정리하고 하느님만을 아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삶을 사는데 있어서 자신의 삶 안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가치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데 있음을 가르치시고,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알리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은 말씀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 여기고, 그 속에서 생긴 여유를 이용해 사랑하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랑도 내가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유욕에 머물러 한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거기에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독이요, 강제이며, 맹목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보다'라는 표현은 우리를 정말 사는데 가족마저도 '원수'로 만드는 이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 말씀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가족들에게 막대하겠습니까? 가족들에게 모르는 사람인척하고 못되게 굴며, 나쁜 행동을 일삼겠습니까? 하느님을 우선해서 생기는 원수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당하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삶에 대한 조롱과 질타가 이어지는 삶은 당연한 바보와 같은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강한 말씀은 하느님을 안다는 이들조차 자신을 위한 틀 안에서 주저하고 한치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내뱉는 호소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처럼 이라면 십자가는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십자가는 죄 없이 우리를 끝내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죽음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나선 길의 모습이 어떻겠습니까?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과 그들이 사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의 말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예언자요, 의인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의 모습에서 본대로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임을 확인시켜주십니다. 그런 길이 쉬운 길이겠습니까? 어려워서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상과 너무나 달라서 하기 싫어서 쉽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걷는 이 길에 받는 것은 존경과 권위가 아니라 조롱과 빼앗김입니다. 잘해봐야 무관심과 외면이 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조롱하지 않고 그 삶을 눈여겨 보고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찾고 싶으신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칼을 품고 가는 제자들 그들은 말도 되지 않는 길을 떠납니다. 어려운 길이 아닌 싫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족이라는 최고의 핑계와 도망거리를 두고 하느님을 위해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길에서 만날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도 다릅니다. 사연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십자가인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을 예수님도 걸어가십니다. 시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가시는 길을 나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도들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결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나선 스승의 모습을 압니다. 그분은 늘 사랑이셨습니다. 그분이 품으신 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분의 삶을 보고 평가했으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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