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칼을 주러 왔다-반영억신부- (마태 10, 34~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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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7-11 | 조회수45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다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갖고 수비아코 동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고행과 기도를 하며 은수 생활을 하였다. 성인의 성덕이 알려지며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마침내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성인이 만든 수도 생활 규칙서는 서방 교회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 구실을 할 정도로 수도 생활의 완덕을 실천하는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인은 547년에 세상을 떠났고, 1966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이 큰 민족으로 불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제1독서). 주님께서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신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잘라 내고 오로지 주님께만 마음을 바치라는 뜻이다. 참된 평화는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욕망을 잘라 내고 거기서 해방되어야 누릴 수 있다(복음). ☆☆☆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의 옛날 번역에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모질다고 여겨졌습니다. 훗날 이것은 히브리 말의 비교급으로,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우들과 잘 어울리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도 함께 가고 야외 행사 때도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우인 것은 확실한데 미사 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기에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칼을 주러 왔다 -반영억신부-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주방에서도, 과일이나 연필을 깎을 때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협하는 엉뚱한 일에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집안 식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에 빠져 옭아맬 수 있어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닐 수 있으며 큰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성령의 칼을 선택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하느님을 우선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은 덤으로 얻게 됩니다. 하느님을 얻으면 부모와 형제와 이웃을 새로운 양식으로 사랑하게 되고 결코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더 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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