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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12 조회수30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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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늘 복음을 보이는데로 써내리기 전에
어지러운 이야기들로 생각을 시작해 봅니다.


복음을 읽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자주 느꼈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왜 나는 하나같이 이렇게 비관적일까?'
'좋은 이야기만 해도 모자랄텐데...'
'이래서 하느님 사랑은 언제 이야기하나...'
'이런 이야기들만 하는 내가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 믿어는 줄까?'

...


복음을 읽을 땐 참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 마음이 간절한데 복음과 세상 사이에 서서 복음을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옮기다보면 어느새 예수님의 '기쁜소식'의 복음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나무라고 다그치는 '우울한소식'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유없이 화나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그럴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혼자서 개탄을 하고는그 기쁜 소식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또 미루기만 합니다.


실제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으례 겁을 먹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경로로 공부도 할 만큼 했습니다. 아직 못한 사람들의 무지를 논하기에도 종교와 관련 없이도 복음의 내용은 많은 경로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이 때론 커다란 무게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은 지식으로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것으로 모임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몰려들며 그곳에서 지도자들이 많이들 등장합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있는지라 드러내놓고 경쟁을 하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전체적인 형세는 신자들이 어느쪽으로 몰리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은 분명한 듯 보입니다. 거기에 따라 자신의 사목 경향을 결정짓는 일도 무시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일이 너무나 즐거워야 하고, 가르침이 아닌 나눔으로 변화하고 그 나눔이 삶으로 확인되어야 할 자연스러운 상황이어야 하는데 정작 복음을 나누어야 할 그 순간에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의 모습, 거기에 복음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느낌 조차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박수를 받으면서도,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눈물까지 훔치는 것을 보면서도 가슴을 죄어오는 벽을 느끼곤 합니다. 그 숱한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 열심을 보이는데도,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 사랑, 천국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넣었던 것과 같은 상황에 있음을 직감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 하느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이만큼 넘쳐나는데,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열에 일곱이나 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왜 이리 답답할까? 왜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렇게 사는 건가?


그럴 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어렵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많은 세상, 놀랍게도 복음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들이 지혜롭고 슬기롭다 말하는 중심에는 하느님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혜와 슬기가 하느님을 가르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설명해 온 옛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은 그 지혜와 슬기를 지니지 못한 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와 그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죄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지혜와 슬기의 사람들이 가르친 하느님의 법은 사람들의 거의 전부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원수를 많이 둔 민족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같은 하느님을 믿으나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죄인으로 길바닥에 던져졌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께 대한 고백은 그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아버지께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와 같은 이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모른다'는 말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리도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외워왔으나 정작 하느님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보면 얼굴부터 가리고, 죽을까, 벌받을까 고민부터 합니다. 하느님이란 말을 배우며 죄를 먼저 생각하고, 사랑이란 말을 밤낮없이 쓰면서도 그 사랑이 가장 최고의 대상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한사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에서 배제된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세상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없는 희망을 꿈꾸는 헛된 욕망처럼 생각합니다. 같이 살아가는 이들 중 세상이 말하는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목을 매면서도 남은 은총이라도 하나 나에게 던져지면 좋겠다고 숨어서 욕심을 부리고 나와서는 사람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사는 이들입니다.

슬기와 지혜를 가진 이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보기는 보았을까요? 그들을 사람이라고 취급은 했을까요? 하느님이란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그들이 들은 하느님은 항상 특별하셨고, 자신들도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 자신들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은 당연한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그 죄인의 운명을 지닌 이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 중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고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그들을 보려 하지 않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이들만이 하느님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해나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접근한 이들만 알 수 있는 진리였던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애초부터 하느님의 사랑은 어려움으로 접근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지식이나 헤아림은 그분을 더 알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온 결과들이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룩함의 열쇠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흔한 단어의 순수함에서 찾아집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느님은 무척 쉬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사랑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한사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에 집중하는 반면에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코웃음을 치고 비웃는 당신을 고려하지 않는 당신에게 돌아올 생각이 없는 사랑을 한다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대단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싫어서 안하는 선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지혜와 슬기를 동원해서 여전히 하느님을 가장 어려운 분, 가장 높은 분, 이곳 저곳에 가두고 숨겨 두고 정말 해야 할 사랑이 아니라 배우고 지켜야 할 것만 강조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잘해봐야 죄인이나 벌을 피한 사람 정도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을 열망하면서도 한 번도 하느님을 알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상황에 안타까워합니다. 예수님을 모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깝습니다. 고해를 하면서도 자신의 죄에 고개들지 못하고, 그가 찾아오기를 애타게 찾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 철부지와 같은 이들에게 주님처럼 사랑하고 가르치며 보여주는 삶을 살지 못하는 제가 가장 안타깝고 화가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들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철부지와 같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데, 알면서도 왜 이러고 있을까요? 몸은 한 없이 편한데 그들에게 가는 것이 소명이 아닌 안해도 되는 일처럼 느끼는 일상입니다. 보이는 길을 걷지 않으니 죄가 더 크겠죠?

지혜와 슬기도 갖추지 못하고, 주님 사랑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게으른 백성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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