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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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13 | 조회수29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혹은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이유를 물어보면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목표가 마음의 안식이나 행복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 말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나 가끔 신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안식이나 구원을 말하며 가르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런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살면 정말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과 우리가 원하는 안식이 과연 같을까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이 안식이나 행복을 선물로 주실 거라고 믿는 모양입니다. 투자를 하면 수익이 생기듯 말입니다. 안식도 그렇게 얻게 되는 목표물인 듯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것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우리 식대로 이해하는데 너무 익숙한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어서 얻게 된다는 안식의 진실을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찾아보고 생각해봅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세상살이가 고달프다고 말하는 우리이기에 이 말씀은 처음부터 우리 가슴에 와 닿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대상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생을 말하고 있진 않습니다. 무거운 짐이 우리 모두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그 짐만은 아닙니다. 복음 속에 자리한 세상은 지금처럼 모두가 경제적인 목표 때문에 고생한다, 불행하다 등으로 평가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 속에 등장하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 율법으로 인해 죄인을 평생을 살거나 하느님의 벌을 피하지 못하는 어려운 처지를 당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에 대해 배운 것이라고는 의무와 법 뿐인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해 죄인이 되어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이라고 하면 자신의 민족을 구해주신 분이시나 정작 자신은 그분의 벌을 피하는 것도 버거운 인생들이 도처에 즐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이 만나시는 버림받고 죄인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해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래서 하느님의 진심에 대해 듣게 되면 자신들의 삶이 결코 버려진 삶이나 벌을 피하지 못하는 애처러운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사람들이 그동안 배운 하느님은 항상 심판자로 계셨고, 그분이 주시는 멍에는 규율과 예물로 표현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주 은총으로 사람들의 정성을 저울질 하셨고, 사람들의 예물에 좋아하시고, 찬송에 흥겨워하시는 분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며 삶에 부족함 조차 하느님께 부덕함이 되고 은총의 차별을 받거나 벌받을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나 들은 하느님은 어디서나 용서가 기본이셨습니다. 빌어서 얻는 용서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이유로 죄인에게조차 희망을 꿈꾸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하느님의 규율은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였고, 또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것 앞에 하느님이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결국 안식이란 하느님을 바로 알면서 느끼게 되는 우리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안식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처럼 살게 되면 우리는 안식이라는 것을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가 사랑이라면, 그래서 짊어져야 할 인생이라면 그것이 불편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겁다 표현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이란 족쇄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서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은 하느님을 믿어서 얻은 것이라곤 지킬 것에 대한 공포나 어려움과 불안이 다인 사람들의 삶을 말합니다. 또한 그 법을 어김으로써 항상 느끼게 되는 불안, 스스로에게 느끼는 좌절감과 실망, 나아가서 하느님께 받은 듯이 보이는 삶의 모든 불행함이 전부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열심한 신앙생활이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가져다 주고,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하느님 때문에 고생하며 무겁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시는 참 멍에는 사랑의 멍에요. 짐이란 사랑의 크기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안식을, 평화를,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란 안식, 평화, 행복을 신앙생활의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로 느끼는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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