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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나?(묵상)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14 조회수644 추천수3 반대(0) 신고

 

 


 

+샬롬 샬롬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질문을 온전히 소화도 못시키고 답변이라고 올려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용서해 주십시오!

하느님은 왜 이스라엘만을 선택 하셨을까?

이 질문을 반대로 왜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만 하느님을 알아뵙고 그 부르심에 응답을 드렸을까요?로 바꾸어 질문을 드려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고,인간은 그것을 보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느님을 알아 뵈어야 되는 것이 정상인데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인간의 눈이 어두워져서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된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마음이 허망해지니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그분의 피조물들을 하느님인양 착각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도 소경의 눈을 뜨는 기적은 베푸시며 당신께 오면 눈이 뜨여서 우리들이 하느님을 알아 뵙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의 영적,육적 병의 치료를 당신이 해 주신다는 메세지 입니다.그러므로 다 당신께로 오라는 요청이시고,사랑의 호소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이해하는 키는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심이 밝히 세상에 알려지고 퍼지게 된 사실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하느님이 자신들만의 민족신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그래서 창세기의 이야기가 그렇게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다 아시지만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임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신이 당신의 민족을 어떻게 사랑하고 보살피고 구원으로 이끄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잘 들여다 보면 내 인생의 역사와 나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의 인생 역사와 또 앞으로 올 후손들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책으로만  이해하고 읽으시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당시에 쓰여질 때는 이스라엘에 의해서 탄생한 책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오늘의 우리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쓰셨겠습니까? 성경의 사건 하나 하나가 내 인생과 유사한 사건들이고, 성경의 인물들의 장단점이 곧 나의 장단점임을 인식하고,그런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이끌어 가셨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보고 또 내 인생도 그 거울에 비추어 보라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책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을 보고,누리고,쓰고 살면서도 그것의 주인도 몰라보고,아니 그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차서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는 지경에 이르셨고, 생각해 보십시오.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인내의 하느님께서 오죽했으면 홍수로 싹쓸어 버리시겠다고 하셨나를요.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그 일을 하셨다면 그 하느님은 정말 나쁜 하느님이십니다.제가 아직 노아가 방주를 몇 년에 걸쳐서 만들었는지 공부를 못해서 날수는 제시하지 못하지만 아무튼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은 하느님께서 그들이에게 죄에서 돌아설 기회를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의로운 노아가 저 혼자 살려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을리가 없거든요. 그 노아가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라, 내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이 말씀으로 미루어 하느님은 세상의 인간이란 인간은 당신이 먼저 찿아 가시어 함께 살자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응답을 하지 않아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응답합니다. 노아의 홍수로 죽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들의 자유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보십시오.하느님은 벌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좀 자세히 묵상해 보면 자신이 선택한 길입니다.아무튼 노아의 홍수 이후 세상에는 죄의 강도가 더 쎄져서 이제는 하느님을 몰라보는 차원을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유명한 저 "바벨 탑"사건입니다. 인간의 최고 악은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나 혼자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부터 모든 죄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정말 제대로 안다면 법이 없어도 잘 삽니다. 에덴에 살 때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있었습니다.

묵상이 옆으로 같지만 바벨 탑 사건은 인간이 하느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살려하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부모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참다 참다 이제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창세11,9) 이 모습은 꼭 예수님께서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뒤엎으시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혼돈의 모습도 보입니다. 곧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하느님의 손길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또 세상을 보십니다.그 때 아브라함이 주님의 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모습을 보셨을까요?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는 제가 영화에서 보았는데 이방신을 만들어 파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들이 신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지도 않고,그러니 숨도 쉬지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걸어디니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어찌 세상을 창조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세상은 고사하고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물건이 어찌 인간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겼고,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절대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갈망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마을에 노아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저도 어디 강의에서 이 부분을 듣고 직접 년대를 계산해 보니 적어도 노아가 죽기 전에 몇십 년을 아브라함이 노아와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자기 아버지가 만들어 파는 이방신과 노아 할아버지가 섬기는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하다 마음이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쪽으로 기울 그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까요?

"얘야!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란다. 이제 내가 너와 계약을 맺을 테니 나를 따를래?" "예!"하고 하느님의 조건을 수락하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교육하시는 장이 성조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꽃이 요셉에게서 완전히 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가 나타나 이스라엘이 자신들보다 수가 많아지자 두려움을 느껴 그들을 박해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억압하는 이집트를 단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값을 받는 것입니다. 항상 하느님은 사랑을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에덴에서의 추방이 벌이 아니고, 죄의 상태로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영원히 영벌을 누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내리신 사랑의 결단임을 이해하신다면 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주인이 누구실까? 나는 누구일까?...하느님께 갈망하고 있던 아브라함을 보시고 부르셨는데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백이고, 하느님의 고백은 "나는 내 백성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 아무개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이라 고백하지 않고,한 사람 한 사람의 하느님이라 고백함이 어찌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결국 이름을 가진 각 사람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죽은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뜻은 아브라함처럼 이사악처럼 야곱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려고 애쓰다 죽은 이는 죽은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그들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기를 그들처럼 애쓴다면 그 하느님은 바로 "나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갈망하던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하느님의 뜻을 왜곡 하여 여전히 백성은 고통속에 허덕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보다, 보다 이제는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알리시지만 어둠이 워낙 짙은 그들은 예수님이 보여 줄 것을 다 보여주지만 결국 그분을 죽이고야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느님은 자신들만의 하느님이라는 관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 등에서 그렇게 하느님은 만민을 사랑하시는 모든 인류의 하느님임을 알리지만 그들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예수님이 세상의 창조자 하느님이심을 세상이 알게 된 것입니다. 아까도 나누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지만 그 역사는 한 개인의 인생 여정과도 같으므로 거기에서 내 인생을 발견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이 내용은 제가 그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깨달은 부분입니다. 다소 어투가 단정적인점은 저 만의 믿음의 확신임을 알려드리며 양해해 주시길 빕니다.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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