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여러분들 모습을 보면
‘오늘 김웅열신부님 강론을 들으려고 먼 곳에서 왔더니 이상한 사람이 서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여러분들 얼굴을 보면 고민이 있는지....
정말 기쁨에 가득 차서 이 미사에 참여하고 계신지를.....
이 사제의 눈에는 보입니다.
자, 여러분들!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활 축하드립니다.”
함께 나눠볼까요?
여러분, 부활 축하드립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셨고~~
또 삶으로 보여주셨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일일이 알려주신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요!
그 말씀이... 그 행동이...
참이었다!
올바른 것이었다!
라고 우리가 확신하게 된 것은 역시 부활사건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사건을 통해서~~
‘아! 그분은 정말 하느님의 말씀이었고,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살면 바른길로 갈 수 있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죠?
무엇이었어요?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은 우리 안에 평화스러운 그 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는 참된 부활절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평화로우십니까?
평화로우셔야 돼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평화는 어떤 평화였죠?
사람들은 흔히 ‘행복이다.’ ‘평화다.’라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조건을 만듭니다.
‘내가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나는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육신의 건강을 찾으면 나는 행복하고 평화로울 거다.’
하지만 다 인간의 부질없는 조건 붙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란 뭘까요?
인간적인 눈으로 예수님의 한평생을 돌아다 볼 때, 우리가 옆에서 볼 때, 정말로 평화롭지 못한 삶을 사셨던 분이예요.
그런데 그분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죠?
<병들고 힘들고 지치고 그런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쉬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평화’라는 말하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평화’, 우리가 인사할 때도 주님의 평화라는 표현을 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평화는 다른 겁니다.
‘어떤 게 주님의 평화냐!
저는 자신 있게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단 말씀드릴 수 있다면 주님의 평화라는 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 않다.’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하고도 관계없습니다.
다만 그 평화라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힘>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붙여가면서 만들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철저하게 우리가 원해야합니다.
원한다는 얘기는 뭐죠?
기도해야한다는 얘깁니다.
육십 번 이상 부활절을 겪으신 신자분들이 대부분이실 거예요.
하지만 그 육십 번의 부활절 동안~~
‘아,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쁨이구나!’
‘아, 이게 부활의 평화로구나!’라는 체험을 한 적이....
여러분들, 몇 번이나 있으십니까?
사순시기, 대림시기,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라는 이 시기는
결국 우리가 간절히 무언가를 바란다는 얘긴데~~
그 무엇을 바라면서 부활절을 맞이하셨는지~~
예, 여러분들 평화롭게 정말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려고~~
얻으려고.... 노력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자! 두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들 신앙이라는 말씀 알죠?
‘신앙’ 쉬운 말로 하면 ‘믿음’
누가 신자아닌 사람들이... 외인들이
“아유 여보시오! 신앙이 뭐요? 귀신 있는 거가 신앙입니까? 뭐가 신앙이오? 도대체 뭘 믿는 겁니까?”
하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 어떻게 대답하실 거예요?
하느님은 사랑!
하느님은 정의!
하느님은 평화!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십자가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라고 얘길 하실 건가요?
맞습니다!
하느님은 평화이시고~~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
정의이시고~~
이 세상에 아름다운 모든 말들을 붙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게 여러분들 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한테
‘하느님은 사랑’ ‘하느님은 평화’ ‘하느님은 정의’
이게 그 아이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요?
우리 자매님 본명이 어떻게 되시죠?
네, 카타리나 자매님!
누가 물어보면 지금부터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카타리나 자매가 <하느님께서 카타리나 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을 카타리나 자매가 믿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나 김대열이가 하느님께서 나 김대열사제를 사랑하신다는 것,
사제 김대열이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그 신앙의 맛을 느끼게 됩니다.
이 얘긴 또 무슨 얘기죠?
여러분들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
아무리 악조건 안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무얼 두려워하랴?
결국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맡겨 드릴 수 있는 그 힘이 생기는 거죠.
여러분들!
‘신앙이 깊다.’
‘신앙이 얕다.’
‘조금 이상한 신앙이다.’
‘아! 저 사람의 신앙은 모범적이다.’
그 신앙의 기준이라는 것은.....
<내가 정말로 구체적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사랑을 느끼고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젭니다.
여러분들! 예수님께서
<비록 조그마한 믿음만 있다 하더라도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다.> 라는 얘기, 그 얘기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정말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하느님께서 날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맡겨드린다면 그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주신다.> 라는 그런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이 안에 계시는 분들 중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때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간단합니다.
‘아버지! 잘은 모르지만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자합니다.’
이 기도면 충분합니다.
어떤 식으로 굴러가게 되더라도 어떤 상황이 다시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
가장 큰 힘, 우리의 삶의 목적인 그분께서 바로 나를, 바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심을........
오늘 복음 말씀이 선한목자죠? 착하신 목자!
그 착하신 목자, 구체적으로 양무리가 아니라 그 양 무리 중에 있는 바로 나, 카타리나가 그 착한 목자를 믿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꼬옥 기억해두십시오.
누가 ‘신앙이 뭐예요?’ 물어보면
‘자네가 하느님께서 자네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네가 깨닫는 게 신앙이라네.’ 라고 말씀하십시오.
이것이 없다면 사실 하느님에 대해서 따뜻한 거 느낄 수가 없어요.
몽둥이 들고 있는 하느님,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하느님, 무서워서 착한 일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착한마음으로 살기 힘들어집니다.
여러분들 고해성사를 볼 때 두 가지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가지 스타일은
‘아, 내가 이 잘못을 고해하지 않으면 성사를 받지 않으면... 내가 벼락 맞지. 야~~ 이래선 안돼 이거 큰일 나겠다.’
해가지고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청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대부분분들이 이런 분들이고....
그런데 이런 분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매일 똑같은 내용을 갖고 고해를 한다는 겁니다.
똑같은 죄 반복해가면서.......
왜 그런지 아세요?
무서움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고백하는 죄는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내가 저 좋은 분의 마음을 또 아프게 해드렸구나. 나 참 나빴다! 저렇게 나를 위해서 애써주신 그분께 또 내가 배신을 했구나.....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존재에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
라는 그 아픔 때문에 고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두 번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 얘긴 뭐죠?
두려움에서는 참된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저 좋으신 분, 정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저분에게 내가 또 칼질을 했구나. 못질을 했구나.’
이런. 이런 마음이 가능할 때 우리가 반복되는 죄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는 거죠.
여러분들 ‘선하신 목자’ 노래 입술을 통해서 부르는 그 성가 안에 나오는 ‘선하신 목자’ ‘목자’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를 묵상하려고 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역시 기도를 통해서만 ‘그분이 정말 선한 목자시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하신 목자 도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정말 그분의 사랑을 내가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는가!
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드릴 말씀은 저는 김웅열신부님의 막내 동생입니다.
지금 감기가 걸려서 목소리가 조금 다른데, 어렸을 때부터 쪼금 힘 안들이고 형 목소리 100퍼센트 흉내 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이따마 교구라고 그러니까 우리나라 식으로 따지면 네 개도가 하나의 교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쿄 바로 위에 있는 사이따마 교구라는 곳인데 교구민이 십삼만 명.....아, 십사만 명이네요. 십사만 명에서 십이만 명이 외국인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이만 명, 평균 사제들 연령은, 현역입니다. 칠십 팔세....
제 본당에 계신 수녀님들의 평균 연세는 여든 넷.
저하고 같이 공소미사 다 다녀요.
저희 본당은 일본에서 극히 드물게 신자수가 만 오천 명입니다.
만 오천 명 중에 만이천명이 외국인입니다.
삼천 명이 일본신자입니다.
일본에서 본당신자가 삼천 명이란 건 엄청 큰 숫잡니다.
그래서 저희 본당에서는 주일미사만하더라도 일단 일본말 써야 되고, 영어 써야 되고, 스페인 말 써야 되고, 한국사람들 보면 써비스로 한국말 써야 되고 이런 상황으로 미사가 봉헌이 되고 있어요.
오늘 무슨 주일이죠?
<성소주일>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우리 한국 천주교회를 하느님께서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한국 천주교회를 써 잡수시려고 하는지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거예요.
지금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어느 나라를 가 봐도 성소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반도는 어때요?
각 교구마다 신학교를 갖고 있어요.
80년대 제가 신학생 시절에 전문 신학자들이 하시는 말씀들이 한반도도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지고, 그리고 자꾸 자식들 숫자가 줄기시작하면 성소가 엄청나게 빠르게 줄거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이 100% 빗나가죠?
지금 거의 다 외아들이예요.
요즘 신학생들, 거의 다 외아들이예요.
먹고 사는데 그렇게 지장 느끼는 사람들 없어요.
그리고 과거보다도 학력이, 일반대학 나와 가지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더 많아요.
이것을 서양신학자들도 이해를 못해요.
어떻게 저 한국에는 저렇게 성소가 끝까지 늘어날까?
물론 가난한 나라있습니다.
아프리카, 베트남, 필리핀 이런 나라에는 신학생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먹고 살고, 그리고 선진국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 된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많은 신학생들이 나오는 거는 사실 역사상 없었던 일입니다.
저도 일본에 한국 신학생 세 명, 필리핀 신학생 두 명, 남미 신학생 두 명을... ..
일본말 가르쳐서 지금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카톨릭이 들어온 지 육백년이 됐습니다.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성인에 의해서 육백년 전에 들어왔는데....
일본 대주교님이 어떤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기자가 “주교님 왜 일본은 신자들이 늘어나지 않나요?”
그 주교님이 하시는 말씀이 참 슬픈 얘기예요.
첫 번째 ‘일본에는 성령께서 활동을 안 하시는 거 같아요.’
대주교님 입에서 나온 말씀 이예요.
그 다음엔 뭐라고 하셨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어떻게 보면 성령이 또 활동하시는 거 같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육백 년 전 신자수하고 지금, 육백년이 지난 신자수하고 똑같아요.”
이게 성령의 힘이 아니면 이렇게 안 되죠?
우리는 이백년 좀 넘은 신앙을 갖고 있죠?
그리고 많은 순교자....
일본도 엄청나게 많은 순교자를 낸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신앙은 거의 불모지 상태!
지금도 팔십 구십 먹은 할아버지 신부님이 움직이질 않으면 미사를 못해요.
우리는 이 백 년 동안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이 국내교회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세계로 눈을 돌려야 됩니다.
카톨릭도....
그리고 제가 이 나라 저 나라 돌아 다녀 봐도 한국인들처럼 신앙심이 제대로 깊어질 수 있는 민족이 없습니다.
이 얘기는 또 위험한 부분도 있어요.
사이비로 빠질 가능성도 많이 있습니다.
타고난 성향이 우리 한민족은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옆에서 장례행렬이 지나 가면은 일단 울어놓고 봅니다.
울고 난 다음에는 ‘누가 죽었어?’
이 심성을 갖고 있는 게 우리 한국 사람들이죠.
이런 심성을 종교적이라고 합니다.
쉽게 화해하기가 가능한 민족....
쉽게 나눌 수 있는 민족, 불쌍한 거 보면....
그러니까 일본도 ‘정(情)’이라는 말을 씁니다.
情!
그런데 걔들은 ‘정(情)’이라고 하면은 좋은 정만 생각하지 우리처럼 미운 정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미운정도 있잖습니까?
‘아유 저 웬수’ 하면서도
‘저 웬수 저거 제대로 살고 있나....!’
걱정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가능한 민족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 이렇게 기도해주십시오.
<일꾼을 많이 보내주시는데.... 그 일꾼들, 우리를 위해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진 외국서양신부님들, 수녀님들.... 일생을 이 작은 나라 어려운 시절에 몸 바친 마음 바친 그 수도자 신부들을 위해서 저희들이 그 은혜 갚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지금 제법 나가있습니다.
남미 아프리카 유럽 제가 볼 땐 유럽교회에도 한국 신부님들 수입하지 않으면 안될거예요. 이제....
지금 경향이 그래요.
제가 일본역사상 육백년 만에 최초로 일본인을 사목하는 한국사람이었는데 사실 그 일본사람들 앞에 서서 사목자로서 활동한다는 거, 그 결정하기가 좀 힘이 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조금 설명 거북한 여러 가지 이유도 많았고~~
그리고 신부라고 하면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이친구들이 어떤 조선사람, 조선사제의 말을 들어줄까도 걱정이 됐었고~~
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 여든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혼자계시고, 아들 셋 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있고, 개인적으로 갈등이 많았습니다만....
<하느님께서 사베리오 신부를 사랑한다.....라는 것을 사베리오가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고 갔습니다..
결과가 좋아요.
그리고 다 통합니다.
마음으로 하는 말... 지들을 위해서 하는 말인지...
확실히 다 알게 됩니다.
뭐 반대 받는 표적도 됩니다.
다른 본당하고 비교가 되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옆 본당도 흉내를 내기 시작을 해요.
여러분들, 우리 한국에 많은 사제들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제들이 역시 인간이니까 허물을 갖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제란, 어떤 사제가 훌륭한 사제라고 하는지 아세요?
능력 있는 사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모자라는 부분을 인정하는 사제가 훌륭한 사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느님한테 매달릴 수가 없어요.
하느님한테 매달리지 않는 사제가 무슨 사젭니까?
약장수.....
여러분들 훌륭한 사제, 즉 정말 하느님한테 매달리는 사제, 실수를 하더라도 남들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결국은 하느님한테 매달리는 사제,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정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세계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되갚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말 사제들이 선한 목자 될 수 있도록~~
예수님만 생각하는 사제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