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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8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18 조회수32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11년 7월 18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2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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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와야만 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지 않으면 사라지고 마는 세상이라 옛것에 대한 존중은 박물관이나 책 속에 있고 사람들은 새롭거나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영향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는 부분에 있어서도 새롭게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예전 새롭게라는 단어는 거듭난다는,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과 시도로 이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하느님을 설명하는 방법과 시도가 다양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방법이 제시하는 바가 전혀 다른 하느님인 듯 생각하거나 하느님의 은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정도로까지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됩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하느님을 가르치는 이들에게서 더 간절한 듯 보입니다. 신자들이 요즘 무엇을 좋아하는지, 신자들에게 맞춰진 방법을 찾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방법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들이 형성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수많은 방법들이 제시되고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예전 공동체들이 그만큼 소리없이 소멸하거나 유명무실해지는 것도 흔하게 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는 모임들은 단 하나의 진리에서 생겼으며 그 진리를 향해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단 한분이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신지라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원리요 진리이십니다. 


물론 주님을 알아듣는 방법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신앙적인 노력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방법적인 시도들을 긍정적인 변화라 말합니다. 신자들의 기호가 많이 달라졌으니 교회도 발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같은 하느님이신지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모임을 기준으로 나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과연 하나가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품고 사는지 걱정마져 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이러한 활동, 배움, 기도 등을 중심으로 신앙의 열심을 당연한 듯 평가하고 칭찬하고 나무라는 모습들을 보면 그 모든 것의 근본이 바른 것인지를 의심하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있어서 이런 걱정이나 의심이 불경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겠지만 사람들의 일방적인 열광과 모임과 활동에서 나오는 자만심에 가까운 태도들은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에 기반이 되어주는 스승들의 태도들에서 한 분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시도조차 하기 힘든 일 같기도 합니다. 


사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모임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 형식은 어디에서 누가 시작했는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참 하느님의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하느님을 맞추고 찾아가는 작업인지가 늘 걱정스럽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나눔은 교회의 근본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도 다를수도 없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우리에게 새로운 하느님의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단순한 가르침에 얼마나 더 접근할 수 있는지 그래서 이 세상에 하늘나라와 같은 삶을 이루어내고 살아가려 노력해야 하는 모두 같은 목표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하나의 진리가 고리타분하고 묶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이 다르듯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은 모두 다르며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가 펼쳐지는 현장은 항상 그 때마다 다른 순간,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삶에서 우리가 신앙생활로 알고 있는 모든 새로운 신앙활동들은 그러한 삶의 일부분일 뿐 새로운 진리나 하느님께 더 가깝게 가는 지름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는 방식의 하나 일 뿐입니다. 만일 그 방법이 하느님의 사랑 이외에 어떤 개인적인 욕심을 채워주는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하느님을 전하고 지키고 가르친다는 이들이 예수라는 근본을 알 수 없는 떠돌이 예언자를 만나서 요구한 것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늘 알고 있는 하느님, 늘 가르침으로 하느님을 말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분에게 스승이라고까지 부르며 새로운 징표를 청하는 장면은 스승이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전혀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자신들의 가르침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을 가르치지만 하느님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하셨으나 그들 눈에는 세상에 없는 기적이고 놀라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들과 하느님을 기준으로 높낮이를 매기고 다가가서 그들도 정말 하느님을 느껴보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은 명쾌합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하느님을 전하는 이들이 목말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리고 체험을 하고 달라졌다는 이야기까지도 듣습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무얼 한 겁니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치는 하느님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표징을 요구해야 하고 그 표징을 이루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설명하며 그것에 열광하여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참 신자라고 부르는 모습들은 오늘 복음의 내용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주님은 요나와 솔로몬을 이야기하시자만, 사실 그 말씀 속에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에서 온 여왕이었습니다. 요나가 알려주었어야 하지만 요나는 도망을 쳤고, 솔로몬은 그 지혜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증언해야 했지만 여왕의 신에게 더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생각해야 합니다. 매일 해야 하는 그 지루하고, 별 감흥조차 없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은 백성들과 하루를 함께 사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지루함에 늘 새로운 것에 접근하고자하는 시도들을 하는 동안 그 불쌍한 백성에게서 심판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나와 솔로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몰랐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알면서도 한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가 싫어 바다로 도망치며 죄인들을 저주로 내몰려했고, 또 한 사람은 이미 받은 지혜보다 새로운 가치를 더 가지고 싶어하며 자신의 지혜 대신 욕망과 욕심을 내 보였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를 마음대로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해도 좋으나 근본은 하나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그것 하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미 영원한 세상을 사는 진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모임의 소속이든,  무슨 신앙생활을 하든 그 새롭고 강렬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찾는 그 모든 새로움 안에서 발견될 것은 오래되고 변하지도 않는 하느님이시니 말입니다. 혹 달라진 자신을 찾았다면 그것에 만족하시고 하나의 진리 안에서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그렇게 지루하게 여기고 고리타분하게 여겼던 사랑을 하고 싶어서 길을 가셨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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