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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19 조회수825 추천수17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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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마태오 12장 46-50절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인생의 좋지 않은 경험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고이고이 길러온 자녀들을 타지로, 군대로, 해외로 떠나보낸 어머님들의 심정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끼니나 굶지 않는지? 혹시라도 건강을 상하지는 않는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그저 걱정에 또 걱정, 전전긍긍, 노심초사의 세월을 보내는 것은 어머니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30년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던 아들 예수님께서 드디어 ‘출가’하셨습니다. 떠나가는 아들 예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즉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겁도 없이 유다 의회 최고 지도부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운다더라. 그 똑똑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여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더라. 혹시 아들이 단단히 미친 것 아니냐? 이럴 때 엄마가 살살 달래서 집으로 다시 데려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너무나 걱정이 컸던 성모님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친척들을 앞세우고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집에 당도합니다. 사람을 불러 아들 예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언행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인간적 눈으로 보면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께서 오셨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셨으면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찾아오셨는데 한번 밖으로 나와 보는 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던지는 데 그 말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말인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물론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작은 시냇물을 버리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더 큰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차단하는 예수님 내면의 쓰라림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작은 사랑을 포기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 받은 상처는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처가 비단 이번 한번 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잉태하던 첫 순간부터 공생활을 거쳐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의 생애는 가시밭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안 좋은 경험들과 기억들, 상처들을 긍정화시키는 데 전문가셨습니다. 끝도 없는 긍정적 수용의 결과는 큰 영적 진보에로 이어졌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님으로서 변모하는 은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런 성모님이셨기에 교회는 성모님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롤모델로 선포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노력해야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인생의 좋지 않은 경험을 부단히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노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노력입니다.

 

    인간만사는 절대 우리 뜻대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전혀 원하지 않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데려가 버리셨습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그 ‘웬수같은’ 인간을 내게 보내주셔서 한 평생 괴롭힙니다. 왜 하필 그 인간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 끊임없이 고춧가루를 뿌려대는지 도저히 이해할 길 없습니다. 왜 원치도 않은 이 지긋지긋한 병을 주셨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반응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하느님께서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으신가?”

 

    그러나 좋지 않은 경험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참 신앙인들의 반응은 상반됩니다. “왜 꼭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 다 뜻이 있어서 이런 고통을 보내주셨겠지?” “이 산 하나만 잘 넘어가면 분명히 평탄한 지름길이 펼쳐지겠지.”

 

    고통과 십자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동료 인간들입니다.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는 이웃들입니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상하게 관심을 가져주고, 아픈 사람에게 병세가 어떤지 물어봐주고, 깊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상처를 어루만져줄 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인생의 쓰디쓴 경험,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웃이 행하는 사랑의 기적으로 인해 치유와 해방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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