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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음을 읽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마태오 13,13-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21 조회수53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1 7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을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마태오 13,13-17)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 이르자 주님께서 짙은 구름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다. 구름은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모세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간다(1독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불행하다.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 주님을 알아뵙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복음).

 

오늘의 묵상

 

 

어떤 경우든 포기는 답이 아닙니다. 엉망으로 사는 것 같아도 좋은 모습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어 있던 ‘좋은 모습’이 은총을 모셔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고 하셨습니다. 물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은총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길만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포장이 안 된 길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평생 그런 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걷다 보면 포장된 길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일과 같습니다. 건강한 나무는 건강한 뿌리를 지녔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뿌리가 튼튼하면 그 나무는 시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시원찮으면 나무는 생기를 잃고 맙니다.
기도 생활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뿌리에 활력을 주는 일입니다. 매일 한 가지씩 선행을 베푸는 일이 나무에 물을 주는 행동입니다. 미사에 자주 참여하고 성체를 모신다면 믿음의 나무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삶이 꽉 닫힌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 안에 숨어 있는 ‘좋은 모습’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막을 지나는 자만이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의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외국을 여행하거나 이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말이라 할지라도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설명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황우석 교수의 사건에서 몇 장의 잘못된 사진으로 그 사기가 들통 났습니다. 생물학의 문외한들은 그 사진이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을 알아듣지 못할 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귀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 없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은 끈질긴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식민 생활을 하였지만 결국은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을 지배하고 괴롭히던 민족은 사라져도 이스라엘은 굳건히 남아 있습니다.
그 속에는 기다림이라는 힘이 있었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민족이 그들이었습니다.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메시아가 오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상은 새롭게 엮이고, 이스라엘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로마의 지배가 극성을 부릴수록 이러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러한 시점에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민중은 그분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보고 환호하지만, 지도자들은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무명의 시골 출신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보기엔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당시에는 이해되는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지 나자렛은 예언서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은 성모님의 고향, 곧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의 고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분을 선택하실 때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기다림도 합당한 대상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엉뚱한 목적일 때에는 오히려 추한 것이 되어 외골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읽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또한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읽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도 있을 수 있고 더 답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 일반 사람들의 마음은 분명 달랐으나 하나에로 가야할 소명이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여 긴 말 없이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는 구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에게는 알아듣게 하시려고 비유를 통해서(마태13,13)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비유로 말하지 않아도 주님의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는 기본은 갖추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분명 일반 군중과는 다른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3,5-6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열고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지해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안셀모 성인은 말했습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보아야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믿지 않는 이들은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께로 향해 있으면 우리의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다. 사람들의 생각을, 그들은 입김일 뿐임을.”(시편94,11)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서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령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139,2-3).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는 만큼 더욱 넉넉해 질 것입니다.(마태13,12)

 

‘목마름은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른 것은 병이랍니다. 졸음도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자고 나서도 졸리는 것은 병이랍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병이 아니래요, 그러나 가지고도 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큰 병이래요.(이규경)

 

세상 것에 병들지 말고 주님의 마음을 읽어서 영적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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