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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2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21 조회수366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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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듣다보면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당시 사람들은 비유는 들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그 비유의 설명까지도 복음서를 통해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을 비유로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이 왜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듣는 이들 가운데에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있었을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무지해서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또 비유는 일상생활에 어떤 것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알아듣기 쉽게 하려는 뜻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당시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설명을 공짜로 얻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하늘 나라와 예수님 말씀 속에 하늘 나라가 달랐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치대로였다면 이 비유들은 그야말로 감탄과 감동이 밀려드는 이야기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었던 하늘 나라, 하느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겁니다. 

옛 예언자 이사야의 증언을 통해서도 이러한 잘못된 편견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이 이해하고 생각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느님을 설정하고 이해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도 사랑도 그들에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같은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시는 분이지만, 실제는 사랑보다 선악에 따른 심판이 앞선 분이셨고, 당신과 사람이 함께 였던 에덴 동산이 회복을 꿈꾸시는 분이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뵈면 죽는다는 공포스런 경외심이 우선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이셨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과 의인으로 나누고 의인은 죄인을 사람같이도 여기지 않는 자만과 독선에 살고 있는 그래서 이미 이 세상에서 조차 천국을 권력과 자리의 세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세상에서는 죄인으로 나락에서 살고 천국은 꿈꾸지도 못하는 생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숱한 비유가 어떤 의미로 들렸을까요? 전혀 다른 이야기, 생소한 소재,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어떤 자격도 볼품도 없는 분이셨다는 것이 그들의 이해를 막아서는 열쇠였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마저 들려주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아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비유들을 들어도 이해할 수 조차 없게 되어버린 그 사람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답답함이란 한탄에 가까웠을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은 말씀을 전하셨지만 이 세상은 그들을 죽이거나 없애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쌓아놓은 하느님을 고수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없애버린 하느님 위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그것이 낳은 관습이 쌓여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백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도 희망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특혜를 받았다고 보기에 가진 것이나 자리에 있어서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배운 것에서도 지닌 것에서도 많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지식을 논하며 이해를 따지기에 너무 쉽습니다. 그리고 책속에 갇혀있는 어렵고 고상한 가치도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신 땅에 떨어진 씨앗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요 살아있는 비유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고르고 골라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하시어 의인 중에 의인만을 뽑아세우지 않으셨고,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분의 얼굴을 보게 하셨으며 심지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 그분의 행동을 고귀하게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음에도 그분의 사랑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쁜 일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비유는 그렇게 우리 안에 실제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하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주변에는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이 놀라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신기한 기적의 힘으로 그쳤습니다. 하느님을 가르치는 이들조차 그 능력에 혹하여 예수님을 스승이라 부르기까지 했으니 그들이 가르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대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불편함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펼쳐진 상황을 쳐다보며 점점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씀을 듣고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 지금도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걱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밀이 사람들에게 실제 모두 드러났을 때, 예수님은 진리에 대한 영광과 찬양이 아닌 십자가를 지셨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 하느님은 세상에서 홀로 죽어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어디에나 십자가가 존재하는 이천년 후의 이곳의 사정은 좀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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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님의 설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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