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을 꼽으라면 나는 내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한참을 방황했었으니까......
나는 그 고통을 어찌할 수 없어 결국 마음 한 구석에 꼭꼭 묻어버리고 다시 꺼내보지 않기로 했다.
그로부터 몇년이 흐른 뒤 한국외방선교회 어느 신부님의 모친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장례식이 치러지는 성당 구석에 앉아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며 한 없이 울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가는 마지막 부분에 그 신부님이 마이크를 잡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몇마디 말씀을 하셨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제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동안의 일로 인해 고통 받으셨고 피해를 입으신 분이 계시다면 부디 이제 하느님 대전으로 마지막 길을 떠나가시는 제 어머니를 용서해 주시길 청합니다. 또 혹시 제 어머니의 용서가 필요한 분들이 계셨다면 제가 하느님과 어머니를 대신하여 용서합니다."
나는 커다란 고통 앞에서도 신앙과 이성 안에서 차근차근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떠내 보내는 아들 신부로서의 해야 할 도리를 하고 있는 그 신부님으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신부님과 나는 똑같이 부모님의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고통에 직면했었지만 그 고통을 헤쳐나가는 능력과 방식에 있어서는 천지 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 일로 인해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현실의 고통을 다시 꺼내어 묵상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현실의 고통은 따르게 마련이지만 그 고통을 헤쳐나가는 능력과 방식을 각기 다르다.
지금 내 주변만 하더라도 참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통과 사련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원래 눈물이 많은 나는 몇 마디 듣기만 해도 벌써 그 고생이 안쓰러워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데, 그 분들은 그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그 분들에게 어떤 위로의 편지라도 드리며 어떤 식으로든 그 고통을 함께 해 보려고 몇번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히 중간에 펜을 꺽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로 대신했다.
하지만 나는 그 분들의 삶에서 고통을 없애 달라는 기도를 바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분들이 그 '고통을 통해서' 언제든지 고통이라는 현실적 문제, 또는 감정과 직면했을 때 그것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사람마다 고통과 마주쳤을때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한 방법들이란 다름아닌 자신들이 대면했던 '고통을 통해서' 터득한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이다.
말하자면 눈물로 톡톡히 값을 치르고 얻은 열쇠와도 같다. 그 열쇠만 있으면 다음에 그 만한 고통정도는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
절대로 고통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 앉아서도 그냥 모른체 눈 감고 회피해서도 안된다. 물론 어떤 때는 도저히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럴때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그 고통을 제거해 주시지는 않을 지라도 적어도 내가 그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과 떠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분명 현실의 고통은 내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시련이지만 우리들은 그 '고통을 통해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주님은 고통 받는 영혼 안에 머무르신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루가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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