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은 왜 레베카의 죽음을 침묵하나?(묵상)2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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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07-22 | 조회수52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샬롬 샬롬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찿는 상인과 같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4.45.47)
성경에서 저가 오늘 묵상하는 레베카의 이야기처럼 무슨 이유인지 침묵하는 내용들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더 중요하기에 숨겨 놓았다고 보았습니다. 원래 보물은 숨겨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이 훔쳐 갈까봐 찿지 못하게 꽁꽁 숨기지만 하느님은 "밭"에 숨겨두셨습니다.
밭이란 인간이 살기 위해 일하는 곳으로 누구든지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다 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말해주지 않고 우리가 직접 묵상해서 알아내기를 원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아무런 노력없이 얻은 열매 보다 스스로가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열매의 값어치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주를 찿는 상인의 마음으로 그것을 찿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서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이미 그물에 가득 채워 놓으셨기에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마태13,48참조)
요한 복음사가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21,25)
보십시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보다 기록되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하시지 않습니까.얼마나 많이 숨겨 두셨으면 공개적으로 "찿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청하여라,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찿아라,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7,7)
우리가 보물이 밭에 숨겨져 있음을 모르고 살기에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러 오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셔서 다 내어 주시고, 당신의 외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보물까지 준비해 놓으셨다고,예수님을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이 사랑을 누리시길 기도 드립니다.아멘.
성경속 숨은 보물을 찿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위의 일들이라면 두 번째로 해야하는 일은 왜? 라는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 인간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선악과 따먹지 마라)을 듣고 왜? 라는 질문을 드렸다면 결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같이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두 사람이 같이 듣고 그 말씀을 토론하고,하느님께 묻고 그러지 않았을까? 하긴 그것도 아니겠네요.아담한테 들은 하와도 질문하지 않았으니 인간은 다 똑같다는 말씀이네요.
아무튼 창세기에서 인간이 죄를 짓는 첫 번째 조건이 하느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왜? 라는 질문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각자의 모습에 맞는 답을 주시고 그렇게 얻은 답은 자신의 인생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이러한 상태를 말씀이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제의 본 주제를 나누겠습니다.
어제의 내용을 요약하면 레베카가 이사악의 "허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가 안되므로 미움이 증폭되어 하느님이 어떤 분인줄 알면서도 "자신의 속셈"을 성취시키려고 거듭 일을 꽤하는 모습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사건만 소개 하지만 레베카가 사는 동안 이러한 형태의 삶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사악과 레베카가 화해 했다면 성경은 꼭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레베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하느님은 야곱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인간이 죄지으면 "저주"하시는 하느님
(창세27,12-13)만 알았지 자비로우시고,용서하시며,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지 못했고,깨닫지 못했기에 고백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나마 의지하고 사랑하던 야곱을 떠나보내고 레베카가 어떤 삷을 살았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자비로우시고,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저주(벌) 받는다는 것만 알고 있으므로 이 상태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증폭시키면서 산다면 결론은 나와 있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레베카는 이러한 상황에서 의지가 되던 야곱도 떠나 보냈습니다.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요즘 말로 우울증 내지는 정신 분열증을 앓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레베카는 그녀가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삶(살기가 싫어졌어요.내가 어찌 살겠습니까? 창세27,46참조)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레베카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하지 못할 만큼 비참하지 않았을까? 라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묵상 해서 찿아내야할 만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묻어 놓으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씨앗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인정하지 못하니 "이해하지 못하고",이해하지 못하니 "용서가 안되고",용서가 안되니,"미워하고",...결국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또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벌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기에 앞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시는 그 사랑의 하느님을 먼저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려 애쓰며 사는 사람은 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려 애쓰면 자동으로 죄를 안짓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하려 애쓰며 사는 사람인가? 아니면 죄를 안지으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어디에 목표로 두고 사느냐에 따라 살면서 느끼는 무게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사랑하며 사셨지 죄 안지으며 살려고 애쓰시지 않으셨습니다.아멘. 알렐루야~~!
저가 레베카의 비참한 죽음을 생각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첫 만남에서 야곱은 왜 부모님의 안부를 묻지 않을까?
야곱이 부모님을 떠난 세월이 얼만데....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엄마의 소식을 ....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야곱이 형과 화해하고 먼저 물어야 했을 것이 부모님의 안부일텐데 묻지도 말해 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무얼 뜻하나요?
알고 있기도 하지만 상처가 너무 커서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들도 말할만한 이야기를 나누지 그 이야기를 꺼내서 상대방의 상처를 너무 건드리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에사우의 동생을 향한 배려가 보입니다.
그리고 형 에사우를 만나고 형이 고향으로 가자고 해도 선뜻 따라 나서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가지 않겠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주인(에사우)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약하고,저는 또 새끼 딸린 양들과 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하루만 몰아쳐도 짐승들이 모두 죽습니다.주인께서는 이 종보다 앞서서 떠나시기 바랍니다.저는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이사악)께 다다를 때까지, 앞에 가는 가축 떼의 걸음에 맞추고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창세33,13-14)
이 고백을 저는 레베카처럼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형과는 화해가 되었다 해도 야곱이 넘어야하는 산은 더 높고 어려운 산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이사악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으로 표현된 것은 모두 에사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께 다다를 때까지"에서 지칭하는 주인은 아버지로 보입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지금 세이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여기에서도 어머니 말은 없습니다. 아직 아버지를 뵈올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아직 앞서가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가축"과 "아이"로 표현하며 그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부모님의 소식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 살 때로 추정해 봅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누가 전했을까?
저는 그 주인공으로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로 보았습니다.
야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엄마가 마지막 유언을 누구에게 했겠습니까?
아마도 드보라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야곱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드보라를 통해 엄마의 소식을 듣고 힘들어 할 때에 삼촌의 비행이 보이기 시작한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속상하면 타인의 잘못이 더 잘 보이기에 그렇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살펴보니,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창새31,2)
혹시 자기 누이 레베카의 죽음을 전해 들은 이후로 라반이 변한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함께 살 수 없음을 야곱은 알았고, 떠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막상 떠나기는 해야겠고 그래도 고향 (베텔에서 하느님께 서원한대로. 창세28,21참조)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떠나지만 형과 아버지와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묵상을 통하여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씨앗을 심는 것(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 마음 먹음,곧 회개)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면 온갖 새들이 날아와서 쉬는 나무가 되는 과정을 야곱이 지금 걸으면서, 그리고 자라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보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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