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디에나 있는 욥.
인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고통 받는 이들의 대명사인 구약의 욥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마녀로 판결 받아 화형당한 이, 노예로 매매된 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은 이, 지진에 삼켜진 이,
휠체어에 실려 다니는 이, 암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이가 욥이다.
욥은 어디에나 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는 기아에 시달리고, 바르샤바에서는
체념 속에 살고 있다. 칠레에서는 고문을 당하고, 아르키펠
수용소에서는 신음 중에 있다.
또한 욥은 끝장난 부부생활, 파탄으로 허물어진 가정,
공허하게 살아가는 이웃, 20대 청년실업자, 정년퇴직의
기로에 선 4,50대, 양로원에서 고독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70대의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 가운데도 있다.
한트케는 자기 어머니의 일생을
‘한 맺힌 불행’이라고 회고함으로써 세상 어머니들을
대변한 적이 있다.
힘든 막노동, 빈약한 수입, 천편일률적이고 탈출구라고는
없는 답답한 일상, 주정뱅이 남편의 학대, 고독, 외로움...
"고통이라는 걸림돌"
오늘의 묵상: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2,15)
이처럼 이 지상의 생활에서는 노동을 해야
살 수 있음을 창세기 때부터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처럼,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단 말이오?”(마태20,15)
품삯을 받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욥일 수있으며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처럼,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16,21)
여기서 라자로는 또 다른 욥일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모든 시대와 환경에
제약을 받지만 그 나름대로 그곳에서 살아갈 재능과 힘을
모두 각각의 은총으로 받아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 내리는 지시입니다.”(1코린7,17)
우리들은 여과 없이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어떤 이와의 비교함이 없이
자기의 삶을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고귀한 삶이니,
그 삶을 휘어잡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기만의 삶에서 그 나름대로 즐기고 기쁘게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
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 키십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 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주십니다.”(1코린12,4-11참조)
자비로우신 모후 Pr. 단원 류 웅 렬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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