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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2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23 조회수29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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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예수님은 궁금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하나 하나 설명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듣기 전 이 비유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몇 가지 가정을 해보게 됩니다. 

분명히 좋은 씨앗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원수는 그 반대편의 악마일 테니 가라지는 악마가 뿌린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 씨앗이 떨어지는 땅을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 생각하고 우리에게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심판 때에 하느님은 우리의 좋은 점을 보아서 심판하시고 우리의 나쁜 점들은 없애버리신다는 나름의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땐 짓더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도 많이 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사회에서는 치열하게 살면서 가끔 죄도 짓고 때도 묻지만 그보다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정성, 희생과 봉사가 크면 그것으로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께 바칠 것이 많아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은총에 가까운 것으로 비칠 수 밖에 없고 사회에서 일하다가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은 점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저 나쁜 점은 고해성사로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죄를 지은 것은 고해성사로 풀고 나머지 정성은 하느님께 드리면 나는 천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는가라는 식입니다. 그야말로 천국가는 방정식이 되어 버리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좋은 덕을 쌓도록 시간을 벌어주시는 분이 되고 결국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가라지조차 하느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가르친다면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설명이 주어집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비유에서 땅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좋은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자녀라 하시고, 가라지는 악한 자, 곧 악마의 자녀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체로서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이 시대, 이 세상에 공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가 복잡해 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에게 좋은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몰아서 해석하고 우리는 안심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설명을 놓고 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인지, 악마의 자녀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좋은 면을 놓고 보자면 하느님에게도 잘 한 것 같고, 그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가끔 좋은 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칭찬도 받고 일도 잘 되고 하니 분명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인 듯 싶습니다. 혹 남이 나의 선행을 몰라도 하느님을 알아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는 죄 또한 많이 짓고 살아갑니다. 그 죄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짓는 죄라서 나 또한 당연히 순리에 따를 뿐이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피해는 내가 직접 하는 죄가 아니기에 모르는 일이라 넘깁니다. 그러나 분명 내 잘못이 누군가에게 해가 되고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내가 결코 극복해 줄 수 없는 죄의 결과를 맺습니다. 나는 도망칠 뿐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 하느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니 그 모든 것도 보실테고 결국 내가 모르는 내 죄까지도 하느님은 그 
뿌리까지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나는 악마의 자녀일까요?


어떻게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내가 도대체 어느 편인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게 되어 버립니다. 복음 속의 밀과 가라지처럼 분명히 우리는 그렇게 자라고 있는데도 스스로 판단할 수도 없는 삶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밝혀내는 시도는 그만 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꾼들이 알겠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실 일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는 착하고 선한 일도 잘 알고, 세상의 이치라 하는 모든 잘못된 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도 가능하고 행동도 가능하다는 유리한 장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옳고 바른 길을 걸어서 세상에 또 다른 밀이 열리도록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산다면 그 몫은 우리 각자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풍성하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함께 있음이 너무 행복한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죄를 짓고 잘못을 한다면 그래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면 내가 기워 갚을 수 없는 몫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라지의 모습 뿐 아니라 가라지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실제로 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우리 입맛대로 만들 수 있지만 하느님은 좋은 씨앗을 뿌리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남들보다 뛰어나려고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안다면 세상이 말하는 그 많은 잘먹고 잘살기 위한 적당한 잘못들을 해야 할 변명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내신 좋은 씨앗이어야 합니다. 가라지처럼 살면서 그 끝에 밀과 같은 열매를 맺으려 하는 시도는 그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이 자라기에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를 수확하려는 분께는 너무도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말로 적당히 우리를 감싸려 한다면 그 말은 결국 누군가에게 나는 죄를 짓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임을 기억함이 좋을 듯 합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은 인내심이 강하신 분이 아니라 좋은 씨앗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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