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과 씨름하고 이긴 사람 야곱의 촐애굽(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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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07-24 | 조회수409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샬롬 샬롬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너의 이름은 이제 더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32,29)
야곱이 하느님과 동이 틀 때까지 무엇을 가지고 씨름한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을 깊이 묵상하고 발견하라고 묻어 놓으셨답니다.
"야곱"은 '발 뒤꿈치'와 '남의 자리를 빼앗다,기만하다'와 관련된다.또는'움켜쥐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에사우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나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름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은 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도 야곱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출애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아직 벤야민이 태어나지 않아서 열 두 아들이 채워지지 않았기에 벤냐민이 태어나고야 가나안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의 가나안"은 아버지 이사악을 만나는 것으로 묵상하였습니다. 이 묵상은 다음에 나누겠습니다.
"바로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홍해로 묵상함)을 건넜다.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창세32,23-25)
모세도 백성과 "밤중"에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이 말씀은 깨달았으면 미루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깨달았더라도 "내일"부터 하겠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깨달은 그 밤에 곧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의 시간은 어둠이기에 밤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야곱이 차마 더이상 앞으로 전진 할 수 없는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야곱이 막상 아버지 집을 향하고 있지만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만하고 움켜쥔 "장자권"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움켜 쥐면 "행복"할 것 같았고, 그것만 가지면 "자유"로울 것 같았던 그것!
그것이 꼭 내것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그것을 얻었지만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은 더 고단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가 야곱만의 문제일까요?
야곱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야곱 같은 "나"의 문제는 아닐까요?
야곱은 밤새도록 또다른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움켜 쥔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자신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자신 사이에서 그는 치열하게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고 표현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야곱이 얼마나 자신이 한 모든 것이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지 한계를 느끼신 하느님께서 그의 육체를 망가뜨리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이상이 오면 훨씬 빨리 깨닫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 뭔가 더 잘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걷지도 못하게 만드시지 않고 절뚝거려서 그렇지 걸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태18,8참조)
정말 그렇습니다. 야곱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생명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그저 "감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감사이고 사랑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직 어리석어 "하느님의 벌"로 착각합니다.
엉덩이뼈를 다치고 나서야 야곱은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엉덩이뼈는 다쳤지만 "눈이 뜨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잃어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을 주십니다. 이제야 비로소 야곱은 "참 장자권을, 참 하느님을 움켜 잡은 것입니다."
야곱은 이 여정을 걸어 오기까지 장자권을 움켜 잡기는 하였지만 그가 잡고 있던 것은 사실 껍데기였음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전에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이 갖기를 소원해도 낳지 못하자 죽어 버리고 싶다고 했을 때(창세30,1-2참조)도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야곱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형과 자신을 어떻게 낳았는지(창세25,21) 잘 아는 야곱이 왜 기도를 안 했는지도 전에 나눔을 했지만 그는 안 한것이 아니라 차마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받은 장자권을 껍데기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마주대하고 살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다 아실 것입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해도 하느님은 부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심을 야곱의 양심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사는 삶을 살아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이라 묵상해 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 우리의 "세례"와 그 의미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례만 받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같다고 보았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축복 받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자권을 받아내는 방법도 문제였지만,장자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축복을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으로 많이 생각하고 신앙 생활을 하곤 합니다.
장자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면 결국 세상적인 것을 움켜 쥐는 것에만 마음을 두게 되고 그것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메세지는 아닐까요?
아무튼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자신을 바꾸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남도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다."(시편49,8)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사람이 제 몸 값을 치를 수 없기에 그 값을 치루시러..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과 겨루어 이겨낸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장자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닐까요?
밤새 자신이 살아 온 삶과 치열하게 싸우고 얻은 그 열매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야곱아! 네가 드디어 이겼구나!"라고 인정해 주신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야곱의 승리를 인정하시고 축하하시는 것이지,어찌 인간이 하느님을 이길 수 있으리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나서 형 에사우에게 "당신의 종","주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움켜 쥐고 있던 손을 펴고 "자유인"이 되었다는 뜻은 아닐까요?
장자권을 이제 살기 시작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뜻대로,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 야곱은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참 장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참 장자권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내가 소유했던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닙니다." 정작 그렇게 마음 먹고 내어 놓으니 형 에사우가 "내 아우야,나에게도 많다.네 것은 네가 가져라."(창세33,9)합니다.
"내 아우야!"
더이상 어떤 용서의 말이 필요합니까?
이 고백은 우리 교회 공동체 전체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고백이고,또한 예수님께서 이것을 실현 하시려고 오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아멘.
야곱은 이제야 "참 신앙,참 장자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저는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창세33,11)
많은 성인 성녀들의 고백에서도 많이 들어본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으로 족하나이다!"
이것이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과 겨루어 이기고 얻은 "참 장자권"이라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멘. 알렐루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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