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야곱이 가나안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다(묵상) | |||
---|---|---|---|---|
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07-26 | 조회수50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샬롬 샬롬
야곱이 하느님을 만나서 씨름하고 이긴 후에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생각하고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아직 야곱의 때를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의 이름을 때에 따라서 어떻게 부르시는지 잘 보시면 묵상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 상황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불립니다.
"에사우가 말하였다.'자, 일어나 가자.내가 앞장서마.'그러자 야곱이 그에게 말하였다.'주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약하고,저는 또 새끼 딸린 양들과 소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하루만 몰아쳐도 짐승들이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주인께서는 이 종보다 앞서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께 다다를 때까지,앞에 가는 가축떼의 걸음에 맞추고,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창세33,12-14)
이 내용은 야곱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보았습니다.
형님 에사우가 용기내고,두려워 말고,나를 따라오면 된다고 힘을 실어 주지만 아직 야곱은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곧 아버지를 뵈올 준비가 덜 되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직 자신의 마음을 짐승이라고 표현하며 "하루만 몰아쳐도 죽을 만큼 괴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야곱이 광야의 여정을 어떻게 걸어가는지 묵상해 봅시다.
에사우는 아우의 이 심정을 이해하고 먼저 떠납니다.
야곱은 수콧으로 가서 삽니다. 수콧은 베텔의 반대쪽으로 '초막들','마구간'의 뜻을 지니며 세상적인 곳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광야에서 생활하였듯이 야곱의 광야생할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창세33,18-20)
이 대목은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너고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우고 스켐에서 한 연설을 연상케 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24,15)
이제 야곱도 하느님만을 섬길 것임을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엘"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비로소 야곱은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자신의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을 드린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없어지거나 자동으로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삶이 탁트인 고속도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산다고 세상을 살면서 겪는 고통이 면제되지도, 없어지지도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딸 디나가 하모르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이것을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하여 하모르의 가족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야곱은 하모르 집안의 프리즈족이 합세하여 자신을 칠까 두려워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몰살당할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 떨 때 주님께서 "일어나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라."(창세35,1)하십니다.
라반의 집에서 떠나라고 알려주신(창세31,3) 주님께서 이번에도 떠날 때 임을 알려 주십니다.(창세35,1) "떠나라!"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들었던 그 말씀(창세12,1)을 이제 야곱이 거듭 듣고 있습니다.
믿음의 완성은 "듣고, 따름"에 있음을 훈련 시키고 계심을 느낍니다.
이제 야곱은 주님을 뵈옵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모습을 살고 있습니다.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려고 마련한 "참 장자권"이 아닐까요?
이제 드디어 베텔에서 야곱이 주님의 요청에 따라 아주 중요한 일을 합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너희에게 있는 낯선 신들을 내 버려라.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일어나 베텔로 올라가자.그곳에 제단을 만들어,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나에게 응답해 주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계셔 주신 하느님께 바치고자 한다.'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낯선 신들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들을 내놓았다.야곱은 스켐 근처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그것들을 묻어 버렸다."(창세35,2-4)
이 대목은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며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신들"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을까요?
라헬이 아버지의 집을 도망쳐 나올 때 훔쳐 가지고 나온 것들입니다. (창세31,19)
라헬이 "저는 지금 몸이 있어,아버지 앞에서 일어 설 수가 없다"며 깔고 앉았던 그 "신들"입니다. 사람 대접도 못 받는 여자가 그것도 부정하다는 "달거리"가 있다며 갈고 앉았던 것들을 "신"이라며 지금껏 모시고 다녔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반이 두루 찿아 보았지만 수호신들을 찿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라반이 돌아간 후에 야곱이 정말 몰랐을까요? 감추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사랑하는 라헬이었기에 묵인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다음으로 레베카의 유모 죽음 앞에서 통곡하고 용서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고 다시 한번 더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창세35,10)
문학 유형상 두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겠지만 영성적 차원에서 묵상하면 이제 다시 한 번 더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뀜을 알리며 이제는 온전한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살 것을 암시한다고 보입니다. 여기에서 "네 몸에서 임금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과 땅의 축복을 받습니다."(창세35,11-12)그리고 이제 완전한 열둘이 채워지기 위해서 "벤야민"이 태어납니다.
'벤야민'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말로 "인내"가 필요함을 봅니다.
야곱이 이토록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목숨걸고 얻어낸 "장자권"을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아닐까요?
사람은 뭔가 목표가 확실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야곱처럼 잘 견딜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라헬의 엄청난 산고를 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산통 뒤에는 "생명의 탄생"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고통이 컸던 만큼 벤야민의 탄생으로 기쁨도 크지만 야곱은 그 기쁨 만큼 라헬의 죽음 앞에서 슬픔도 동시에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는 삶이고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고통"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야곱은 "당신은 내가 살아온 힘이며 살아갈 힘이라고 "벤야민(내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오른쪽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셔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한 힘으로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 힘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벤야민을 특별히 사랑한 그 마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여주는 기사는 라헬이 죽고 나서 큰아들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소실 빌하에게 가서 그와 동침하였다고 전합니다. (창세35,21-22)
이 본문은 왠지 현재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겪어내는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래도 다 소화 시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다 할지라도 슬픔이 크지만 이 사건은 슬픔이 아니라 "비참"이 아닙니까?
그것도 남이 그랬더라도 속상한데 어떻게 내 아들이 내 아내를 그런단 말입니까? 인생 안에서 가장 비참한 사건은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들의 맏이인데 자신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어도 정작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기는 고사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사건이나 르우벤의 추행은 하느님 입장에서 보시면 야곱의 기분과 똑같은 것은 아닐까하고 묵상해 봅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 입장에서든 인간의 입장에서든 가장 큰 상처라고 봅니다.
우리들이라도 많이 사랑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지금까지의 나눔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은 참으로 멀고도 고단하였습니다. 루카복음 15장에서 소개하는 작은 아들처럼 온갖 고생과 고통을 다 체험하고 나서야 돌아갑니다.
딸 디나의 겁탈 사건,스켐인들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사랑하는 유모의 죽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사건(아들이 자기아내와 동침함)을 겪고 가장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마침내 야곱은 마므레 곧 키르얏 아르바에 있는 자기 아버지 이사악에게 다다랐다.그곳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나그네살이하던 헤브론이다. 이사악은 노인으로,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고 죽어 선조들 곁으로 갔다.아들 에사우와 야곱이 그를 안장하였다."(창세35,27-29)
세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지난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왜 성경은 아무 말도 전하지 않을까요? 우리 같으면 할 말이 무지 많은데....
이것이 "사랑의 표현"아닐까요?
이것이 "가족이고 식구"가 아닐까요?
야곱이 스켐 근처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그것들(낯선 신들과 귀걸이)을 묻었을 때 모든 지난 일들이 묻혔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처음부터 야곱인 것을 알고 주셨으니 아버지는 묻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처음부터 형 에사우와의 화해로 다 해결 된 것이었습니다.우리들의 죄가 땅에서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 야곱의 이 모습이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며 들어오면 끝인 것을 먼 곳을 둘러 둘러 온 힘이 다 빠지고서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아멘.알렐루야!!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