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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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7-26 | 조회수30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 結?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밭은 세상이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비유가 비유에 머물지 않고 설명이 되면 그 순간 그 내용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던 좋은 씨와 가라지, 그리고 땅, 수확 때, 일꾼들이 설명과 더불어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세상과 사람과 하느님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교훈이 아닌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밭은 세상이라는 말씀이 눈에 깊이 박힙니다. 이 밭에 밀과 가라지가 뿌려지고 이 둘은 세상 종말 때까지 함께 자라게 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 그러나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또 다른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밀이 자라기에는 오로지 빼앗고 자신을 위해 한 해만 사는 것이 그만인 가라지는 무섭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세상을 선하게 살고 법을 지켜가면 살게 되면 손해본다는 것을 초등학생까지도 이미 짐작하는 세상. 그러면서 어디서건 서슴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죄도 없다고 말하며 그것이 상대적으로 가장 최선의 의인이 되는 조건이라고 아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판단하고 선택할 때 자기 자신은 절대적입니다. 남을 돕는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고, 남에게 사랑을 하는 것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기에도 가진 것이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그것을 위해 잠시 사랑을 멈추고 가진 것을 모으는 시간, 곧 부자되는 시간이 합당하게 설명되고 강조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조차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냥 바로 나를 사랑하면 될 일을 왜 남을 도와주어야 합니까? 그래도 남을 돕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 때 등장합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꽤 설득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 사랑도 하고 그래서 하느님도 나를 예쁘게 보시고 복도 주시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영원한 생명, 구원도 얻게 되겠죠. 하지만 결국 목적이 다른 이런 사고방식은 사랑의 대상을 바꿔가며 더 새로운 자극을 찾게 됩니다. 실제 대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기에 습관과 미련만 남을 뿐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뿌린 사랑이 여전히 내 것이기에 내가 그만두고 거두어도 그것은 내 권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자라고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합니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면 내가 빨리 앞질러야 하고, 나보다 모자란 인생은 내가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거나 양분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훌륭한 인생이 되어 하느님 앞에 한결같은 의인으로 자라나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의인입니다." 성당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워합니다. 누군가는 축복받은 인생, 은총의 세월이라며 부추기고 그가 베풀었다는 사랑을 받은 이들은 죽을 때까지 고마워해야 하는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성공한 사람과 그 성공에 밑거름이 된 인생들. 그렇게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인가 봅니다. 여기에 한 말씀이 던져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현실이 된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의 심판에 대해 눈에 보이는 현장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아들의 나라이니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성당을 다닌다면서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을 말할까요? 이미 성당을 다니기에도 부끄러운 죄인들이 그들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족함에 고개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성당에서조차 고개를 못드는 인생일테니까요. 그들은 심판받으러 성당에 다니는 것이 아닐테니까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판단일테지요. 이야기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이들 안에 발견되는 참 죄인들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고 자신도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끝까지 저항할테지만 이미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라는 움직일 수 없는 모범이 생생한 사람으로 등장해 있기에 그분처럼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사랑을 구하며, 행복을 말하며 성당에서 조차 의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노리는 이들은 모두 심판 받게 되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 가라지는 우리의 예상보다 크고 강합니다. 열심히 해 봐야 열매를 맺기 위한 희생이 다인 하느님의 좋은 씨앗에 비해 자신만을 생각하고 달려가는 인생이 내뿜는 힘은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그들은 점점 위로 솟기 때문에 하느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자신의 정도 이상에만 필요할 뿐 지나친 과거나 어두운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에는 그들의 인생조차 아름다울 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그들은 칭찬이라는 세상의 햇빛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씨앗은 결론을 기다리며 인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좋은 씨앗의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사랑하고 땅이 주는 모든 영양분에 감사로 온 몸을 채우고 땅에서 가장 멀고 가장 높은 곳 까지 그 양분을 실어 열매를 맺습니다. 근본에 충실하고 그 성장의 모든 부분에 감사할 것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 그 끝에 또 다른 풍성한 생명으로 세상에 다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냅니다. 좋은 씨앗은 그렇게 풍성해집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대로 하늘 나라 곡간에 쌓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눈과 마음은 그렇게 우리를 구별하십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좋은 씨앗인지. 그것만 생각하고 물어보십시오. 되돌리지도 않을 가라지에 대한 반성은 하느님께서 심판으로 물으실테니 오직 좋은 씨앗에 대해서만 물으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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