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난처한 물음.
인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고통은 인간을 일생 동안 끊임없이 따라다는
그림자와 같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90,10)
왜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할까?
나는 감상적인 나르시스처럼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고통이 이토록 흘러넘치는가를 묻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한테서,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의 연인이라 할 그들한테서 인생에서 최소
의 것, 매우 작은 희망마저 앗아가 버리는가?
얼마나 자주 시편 작가처럼 외쳐야 했던가?
“두려움과 떨림이 저를 덮치고
전율이 저를 휘감습니다.”(시편55,6)
현대의 어느 작가는,
“하느님을 위한 유일한 변론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빈정거린 적이 있다.
우리는 유쾌할 수 없으나 부인하며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사실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이 참혹한 세상을
만들어 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웃어넘길 불경스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
다고 발뺌할 수 있을지 모르나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우리 내심의 정곡을 찌른다.
세상의 비참함이 내 가슴을 발기발기 찢는다.
하느님이 이 따위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나는 그런
하느님은 싫다.
그렇다.
왜 이렇게 세상에는 고통이 넘치는가?
죄 없는 이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믿는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고백하듯 하느님이 모든 권능을 지니고
계시다면, 그분은 왜 그 숱한 고난을 내버려 두시는가?
이처럼 난처한 의문과 함께 우리는 길을 떠나고자 한다.
"고통이라는 걸림돌"
오늘의 묵상 :
우리들도 처음에는,
왜 이 세상에 나왔으며?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 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늘까지의 내 모습과 생활이 온전히
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나를 이끌어 주신 분이 분명이 계셨으며
그때 그 어려움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분의 도움이
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3,10-11)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오늘 새 아침을 저희들에게 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를 받으소서 !
오늘 이 시간에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열심히 일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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