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용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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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일봉 | 작성일2011-07-28 | 조회수82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경향잡지 창간 98주년 기념 수필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2004년4월호에 게재 되었던 저의 큰 딸 조세실(지금은 2남1녀를 둔 사랑받는 양씨 문중의 장손 며느리)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사실 이 글에 대한 답신으로 " 주님, 제가 졌습니다"를 뒤늦게 쓰게 되었고, 지금도 제 마음이 조금 흐트러 질 때는 딸이 쓴 이 글을 읽으며 자세를 바로 잡곤합니다.
용 서 조 인 애 세실리아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가 보다. 아침저녁으로 입술을 내밀어 후 불면 입김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거리에 뒹구는 낙엽들을 밟으면 바삭바삭 크래커 씹는 소리를 내니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오는 길목을 즐길 만큼 여유를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올해 24살 나이의 장녀인 나는 졸업을 코앞에 둔 대학교 4학년생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취업준비나 대학원 진학 등으로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 가느라 다들 정신없이 바쁜 것 같다. 얼마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열띤 대화 속에서 나 는 늘 꿀 먹은 벙어리요, 고개 숙인 죄인이 되고 만다. 이름 석자 드러낼 명함 하나 제대로 가질 수 없는 내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우리 가족을 애타게 찾는다던 외숙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주 소를 수소문하다가 알고보니 부모님과 내가 지명 수배자가 되어있더란 소 식을 전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끊임없이 밀려왔다. ‘아버지, 당신은 대체 저에게 무엇입니까? 왜 자꾸 우리 가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시는 거죠? 아버지가 싫습니다. 당신이 나의 아버지란 존재만으로 제 삶 을 짓밟고 계시니까요.‘ 나는 절망했다.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리란 희망으로 전공과 무관한 공무원 시험을 치르려고 이를 악물며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는 일 마다 훼방을 놓는 나의 아버지. 나는 그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은 어릴 적부터 시작 되었다. 아버지는 정훈장교로 다른 군인보다 유난히 전근을 많이 했다. 그 때문 에 어려서부터 말없는 불만이 조금씩 쌓였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지없 이 전학을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발령지는 대구였다. 나는 수업 시간마다 지방 사투리 때문에 애를 먹었고, 유독 텃세가 심했던 터라 친구들과 어 울려 지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홀로 보냈다. 상위권이던 성적은 뚝 떨 어져 급기야 문제아 취급을 받았고 명랑했던 성격도 점점 의욕을 잃고 어 두워져 갔다. 우울했던 대구에서 보낸 2년이란 세월을 뒤로하고 그제야 나는 서울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20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이 온통 원망과 증오로 가득차 아버지와 나 는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비참했던 시절의 기억을 모두 떨쳐버리고 싶었다. 새롭게 내 삶 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의 집, 나만의 공간을 생각만 해도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꿈도 잠시, 서울땅을 밟는 순간 서러움의 눈물부터 흐르는 걸 나는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도 꿈꾸던 우리 집은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 두 칸짜리 지하실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퇴직금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고 싶은 아버 지의 원대한 포부 때문이었다. 이사 이후 어머니는 화병으로 자주 앓아 누 우셨다. 서울이 고향인 어머니는 남편의 직장 때문에 그동안 외롭고 힘든 객지생활을 참아오셨던 터였다. 어머니의 꿈은 참 소박했다.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예쁜꽃과 야채를 가꾸며 두 딸이 시집가서 손주들과 손잡고 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며느리로 시집을 왔지만 신혼 초부터 중풍 걸린 시어머니 를 모시며 살았다. 아버지의 형제들과 고모들 모두가 각자의 핑계로 할머 니를 버렸기 때문이다. 전방에 살 땐 겨울이 되면 수도가 얼어 빨래를 하려 면 빽빽 울어대는 연년생 갓난아기들을 양쪽에 끼고 냇가로 나오셔야 했단 다.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며 우리 자매 기저귀에다 대소변 못가리는 시어 머니 속옷까지 맨손으로 빠셨던 어머니는 요즘도 손가락 관절염으로 고생 하신다. 가족들을 위해 붐이 부서지도록 희생만 하시던 어머니의 꿈이 아버지 때 문에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고통의 시간동안 어머니와 우리 자매는 ‘포기’의 깃발을 들고 ‘증오’를 방패삼아 아버지의 독재적인 군림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불행중 다행이었는지 세 여자의 불 행이 컸던 만큼 아버지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우리는 정원이 아주 넓은 2층집으로 이사를 갔고. 아버지는 고급 승용차를 몰며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회사로 서울 잠실과 논현동을 번갈아 출근하셨다. 그러나 나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증오의 상처는 아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동아 리 활동을 핑계삼아 그동안 억눌려 지냈던 나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 멋대로 방치해 버렸다. 내가 세상을 흥청망청 즐기고 있던 그때 아버지의 사업은 사기를 당해 부도가 났다. 그 뒤로 나름대로 학비를 벌어보고자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모부에게 학비를 부탁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해 어 머니와 둘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던가. 어렵사리 학교에 돌아갔지만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 다. 용돈을 아끼고자 동기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학교 도서관에서 숨어 지냈다. 점심식사는 천 원짜리 김밥 한 줄 저녁식사는 백 원짜리 자 판기 우유로 주린 배를 달랬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학교 성적이 좋아져 학 비를 줄여가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한편 아버지는 빚을 갚으려면 한꺼번에 목돈을 벌어야 한다며 또다시 사 업에 투자할 궁리만 하셨다. 아버지에겐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 댁에 얹혀 살았다. 어머니는 노환으로 쓰 러지신 할아버지 수발을 드느라 피곤에 절어 볼이 움푹 패고 온몸에는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이 살면서도 외갓집 식구들에게 큰소리 한번 제대로 쳐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내게 가슴 저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친정 아버지를 손수 모실 수 있어 참 행복한 여자라 하선다. 병간호 하느라 날마다 밤잠을 설치면서도 아침 일찍 가족의 밥상을 차려주시고 식구들이 모두 나가면 그제야 쪽방으로 건너가 새우잠을 청하시는 어머니. 그모습을지켜 볼 때마다 날마다 술에 절어서 뻔뻔스럽게 코를골며 주무시던 아버지의 얼굴을내 마음속에서 수없이 짓뭉개버렸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났을까. 외할아버지는 딸의 지극한 효성을 갸륵하게 여기셨던지 어머니의 소원대로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는 얼마 뒤 매우 평온한 얼굴로 어머니와 이별을 나누셨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호상이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시련을 남길 씨앗일 줄이야! 큰 외삼촌 댁에서 할아버지 집을 빼가겠다는 것이다. 바로 윗집에 살면서도 부모님을 위해 미음 한번 쑤어드려 본 적 없던 집에서 갑자가 맏자식 도리를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할아버지와 사별 이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던 어머니는 이 소식에 더욱 충격을 받고 몸져누우셨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집을 비워야하는 우리 가족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다. 하루하루를 하느님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며 매달렸다.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솟아날 구멍이 갑자기 생겨났다. 내가 어렬 적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던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그동안 형 편이 폈으니 그쪽으로 오라고 말이다. 아버지의 조카는 예전 에서 가구도 가져올 수 없는 우리 집 형편을 눈치채고 침대와 옷장, 화장대까지 모두마련해 주었다. 우리 가족은 그동안 버림받았다는 절망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하느님의 구원을 느끼며 감사드렸다. 서울로 처음 이사를 왔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형편없는 처지인데도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는 건 어찌된 일일까? 낮에는 한번도 해본 적 없던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도하며 성서를 읽 으시느라 수면이 부족했던 아버지는 갑작스런 과로로 쓰러지셨다. 검사 결과 당뇨와 위궤양에 지방간까지 앓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잇몸이 허물어져 이는모두 빠지고 당뇨가 심해 몸무게가 급격히 줄면서 얼굴이 민망할 정도로 해쓴해졌다. 우리 식구는 다달이 한 번 타는 아버지의 연금으로 겨우 살아나갔다. 게다가 지명수배자로 시험을 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내 현실은 나를 또 한번 무너뜨리고 말았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자주 체하고 설사를 하는 바람에 기력이 약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방구석에 누워 꼼짝 않는 딸의 손을 말없이 이끌고 간 곳은 동네 성당의 성령기도회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곳에서 조금씩 마 음의 병부터 지유했고 건강도 차츰 회복하였다. 우리 가족은 그 뒤로 함께 모여 9일기도를 드렸고 주일마다 미사에 나갔다. 그러나 아직 우리 집에는 해결하지 못한 과제 하나가 남아있었다. 영적 으로 모두 속죄하고 보속을 행했지만 세상의 법은 천상이치와 달랐다. 어 느날 시험의 그날이 닥쳤고 부모님과 나는 경찰서로 불려갔다. 부모님 손 목에 시퍼런수갑이 채워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주님께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외쳤다. 서류를 쭉 훓어보던 담당 형사가 갑자기 나와 어머니를 풀어주겠다고 말 했다. 우리 가족처럼 전직 공무원들이 사기 누명을 쓰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오히려 고소했던 상대방을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와 나는 집으로 돌아와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아버지를 위해 기도드렸다. 그러자 며칠 뒤 그야말로 기적처럼 아버지가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가정의 축복을 통해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견고한 믿음과 따뜻한 희망을 심어주신 것이다. 위령성월인 11월이었다.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대사를 받 는 기간이라 했다. 나도 아버지 손을 잡고 가까운 묘지로 향했다. 고통을 겪고 있을 연옥영혼을 대신하는 우리의 기도가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수 있다는 희망으로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김 바오로’ 와 ‘정 마리아 라고 새긴 교우 부부의 비석을 발견했다. 사이좋게 포개진 두 무덤이 마치 생전에 다정했던 두 분의 모습 같았다. 길고 긴 연도와 묵주기도를 마친 우리 부녀는 시장기를 몹시 느끼며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펼쳤다. 서로의 반찬을 챙겨주며 정다운 식사를 나누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높고 푸르렀다. 투명한 햇살은 등을 따스하게 어 루만졌고. 여기저기에서 새들의 사랑스런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버지 와 나는 천상의 음식을 나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처럼 참으로 행복했 다. 따스한 묘지에 슬그머니 기대어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포도나무요, 너희는가지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작은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고 이내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 러내렸다. 아버지는 내 울음이 멈출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그동안 참아왔던 용서를 딸에게 정식으로 청해오신 것이다. 나는 대답을 해야 했 다.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저는 이미 아버지를 용서한 걸요. 아버지--- 이젠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아버지 노래를 조심스레 따라불렀다. 그것은 나의 용서요. 아버지 를 향해 꽃피운 사랑의 노래였다. 아버지는 내게 좌절과 시련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어떤 선물을 마련해 두셨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능 하다는 괄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묵주와 성서를 끼고 소리 없이 참회의 눈물을 지으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애타게 나의 용서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딸의 손에 소중히간직했던 ‘천국의열쇠’를 살며시 쥐어주신다. 애벌레처럼 세상일에만 맞서려던 나를 깊은 절망에서 건져주신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란 걸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앞으로 나의 꿈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두 날개로 훨훨 날아다 니며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작은나비---. 이꽃 저꽃으로 사랑 의 씨앗을 나르며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주님의 작은 일꾼이 되고 싶다. 지금 내 겉모습은 비록 변화가 없어 보이는 고치일지라도 고치 안의 참모습 은 한 마리 나비를 향해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이제는 애벌레 시절에 받으려고만 했던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 보고 싶다. “예수님! 제가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오늘도 내 안의 가장 고운 비단실을 뽑아 나의 고치를 감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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