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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8주일 2011년 7월 31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29 조회수470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18주일     2011년 7월 31일.

 

마태 14, 13-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는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가 그대로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기근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잘 모셨을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먹을 식량으로 오천 명의 기근을 해결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 보도라고 가정하면, 우리에게는 많은 의문들이 생깁니다. 복음서들 전체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기적적 무료 급식을 한 인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며 유혹하는 자의 말에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 4, 4)고 대답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마태 6, 25)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사실 보도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그곳에 과연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이 운집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가? 외딴 곳이라고 말하면서 먹고 남은 것을 담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현대적 음향 시설도 없고, 자동 배식 장치도 없는 시기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배식할 수 있었나? 오늘의 이야기는 이런 의문들에 답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셨던 인물이고,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그분에 대해 남긴 문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한 신앙의 문서들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회상도 있고,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도 그들의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모세의 가르침을 중심축으로 한 문서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해 구약성서의 표현방식을 비려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군중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자기 먹을 것을 마련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모세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느님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병자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열왕기(2열왕 4, 42-44)에 따르면 그 옛날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엘리사보다 훨씬 더 큰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의 복음에서 빵은 4분의 1로 줄여서 다섯 개라고 말하고, 먹은 사람은 50배로 늘려서 오천 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진 것을 나눕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가엾이 여기며, 고치고 먹이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각자가 자기 병을 걱정하고, 각자가 자기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을 가엾이 여깁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나눕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살아 있는 생명이고 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면, 우리 주변에 굶주림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말은 나눔은 그렇게 풍요롭다는 뜻입니다.

 

물론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신앙공동체가 실천하던 성찬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위해 사용하던 표현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에 있는 성찬, 곧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가엾이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도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이웃과 나눌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가 찾는 정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를 추구하면서, 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의와 공평은 하느님을 기준으로 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마태 25, 31-46)는 정의와 공평을 위한 하느님의 잣대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말은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축복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의와 공평은 부족합니다. 인간이 제도적으로 공평하게 만들어서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지향한 공산주의가 얼마나 냉혹한 사회를 만들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엾이 여김을 모르는 냉혹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엾이 여기며 나누는 따뜻한 숨결을 인간 생명 안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이야기는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 나누어서 모든 이를 풍요롭게 하는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성찬에 임하는 우리도 그렇게 가엾이 여기고 가진 것을 나누며 살라고 말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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