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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30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30 조회수41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1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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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복음을 읽다보면 복음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여러모로 세례자 요한과 비교되는 일이 많습니다. 비슷한 점도 많고 또한 어머니로부터 이미 가족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어서 더 그런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극과 극이라고 할 만큼 다른 분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성자, 구세주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그분을 어떻게 생각해도 하느님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 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귀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만 실제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전혀 이런 명성이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머리에 그리는 그 대단하고 거룩한 모습은 세례자 요한에게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두 분의 공통점이라면 불가능한 조건에서의 탄생이었다는 것,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상반되는 조건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임신이 불가능하고 늙은 어머니에게서 탄생하였다면, 예수님은 처녀의 임신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임신과 탄생은 모든 이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가운데 현장 중계가 이루어지듯 탄생해서 세상 전역에 알려진 하느님의 일이었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시작부터 숨겨지고 감추어진, 그나마 그 임신과 탄생이 친부가 아닌 요셉이라는 이에 의해 지켜지고 보호되었다는 소문이 고을에 퍼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떳떳하지 못한 가려진 탄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들의 관심 속에 컸고, 모두가 기대하는 대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거기서 성장해서 예언자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탄생의 순간도 고향을 비켜났고 돌아온 고향에서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성장해서 어느 날 집을 떠나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던 무수한 죄인들 사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사람들을 꾸짖고 세례를 베푸는 예언자로 세상에 드러났고, 한 사람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세례를 청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어찌보면 잘 해 봐야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볼만한 관계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으로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둘을 헛갈리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사는 방법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도 모두 달랐는데 말입니다. 복음에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 세례자 요한의 기적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하나도 같지 않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어떻게 헛갈릴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오늘 복음의 대부분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세례자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가 자신이 하려하는 일에 옳지 못함을 직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은 없었던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위신이 한 예언자를 죽여야 하는 결정을 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했지만 예언자 하나를 죽여서 얻게 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의 요구에 휘말려 그 청을 인정하고 맙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지하감옥에서 죽게 되었고 순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사실 그의 죽음은 하느님을 거부해서가 아닌,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자신조차 동의하지 않는 명령에 의한 것이기에 더욱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헤로데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우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만큼의 유명세가 있는 분이었다면 헤로데는 분명 예수님을 달리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고 그래서 그분을 바로 인지할 수 없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숨겨져 있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세례자 요한이 이야기하던 하늘 나라에 대해 선언만이 아닌 실제 드러나는 행적들로 사람들을 잠식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기에 예수님의 숨겨진 모습은 무덤에서 그가 일어난 듯 느껴질 수 있었고, 예수님의 모든 소문이 하느님을 축으로 세례자 요한이랑 겹쳐졌기에 헤로데가 착각을 일으킨 듯 합니다. 


복음의 전면에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 세례자 요한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위상을 갖추고 살았지만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지워지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그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지 조차 먼저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자신의 미움 때문에 요한을 죽인 것이 아니듯,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결정한 빌라도의 결정 또한 요한에 대한 헤로데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원한이 아닌 예수님을 없앰으로써 자신들의 잘못된 의로움을 정당화 하려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요청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어린 딸을 시켜 잔인한 짓을 하듯 백성의 원로들은 백성들을 선동해서 빌라도를 압박했습니다. 


결국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을 보이는 요한과 예수님은 이런 상황들 속에서 같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현재를 과거의 요한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리 없이 요한이 걸어야 했던 그 길을 따라 걷는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의 소문은 헤로데에게 만큼은 부활에 대한 체험이었을지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의 말과 내용이 이렇듯 다시 사람들 사이에 살아있다는 것에서 그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가르침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 속에 예수님의 일생은 신약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말씀의 실제 모습이셨고 그분은 이미 이전부터 우리에게 와 계셨습니다. 그분을 보며 이미 듣고 보았던 하느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래서 가능한 일이 됩니다. 성경 속에서는 그렇게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처지에서 하느님을 확인하는 인생들의 이야기들을 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를 보듯 우리 역시 이 삶의 순간에서 예수님을 떠올릴 사건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짐작을 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너무도 다른 인생이었지만 모든 것이 다 다른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한 가지 생각으로 이끄십니다. 그렇게 이 하루를 과거가 아닌 지금의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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