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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신과 고집 -반영억신부-(마태오 14,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31 조회수41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1 7 30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마태오 14,1-12)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년과 희년을 제정해 주신다. 희년에는 어떤 사정으로 잃었던 소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고, 종으로 팔려 간 사람들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가족과 친척에게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유의 공평성을 회복시켜 주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희년 정신이다(1독서). 헤로데의 비윤리적 생활을 두고 요한은 그에게 진심어린 말을 하다가 헤로데의 미움을 사고 감옥에 갇힌다. 헤로디아도 자신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기회가 오자 간계를 부려 요한을 죽게 한다. 이는 의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의 세력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여 준다(복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게 살았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증오를 받아 어이없이 죽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죽음을 닮는 것이 됩니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조광조는 중종 임금 때 등장합니다. 연산군으로 폐해가 심했던당시 사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개혁에 열정을 쏟습니다. 인맥을 끊고, 제도를 바로잡고, ‘임금의 중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전남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습니다. ‘기묘사화입니다. 당시 37세로 한창 일할 나이에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지요.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 중에 가짜가 많다면서 가려낼 것을 주장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
모든 죽음에는 조금씩 억울함이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죽음이 됩니다. 세례자의 죽음 역시이런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억울함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하면어린이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서감사를 찾아낼 때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 

바른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른말보다 ‘듣기 좋은 말’을 더 바라는 까닭입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도 있지만 우선은 입에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간신들로 둘러싸인 통치자를 둔 백성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런 통치자에게서 백성을 위한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바른말, 옳은 말은 통치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첨과 아부는 우리를 자만하게 만들고 삶을 망치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른말로 충고하는 친구를 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신의 의견과 자주 충돌해 온 추기경을 국무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신과 고집

  -반영억신부-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죽었던 요한이 되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의인이 죽으면 반드시 다시 살아 돌아온다고 생각하였으니 죄짓고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죽을 짓을 했습니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해서 많은 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요한은

거듭 거듭 잘못을 지적 했습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확실히 한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소신 있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마태14,9) 요한의 목을 베는 불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위신이나 체면 때문에 불의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똥고집이 아닐까요? 홀로 정의를 외치며 장엄하게 죽어간 예언자의 죽음 앞에 모든 권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하는 나약한 헤로데가 있습니다.

 

요한의 질책에 자존심이 상해 그를 감옥에 가두고 결국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 의인의 목을 베어버린 헤로데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진정 어린 충고를 무시하고 내 고집을 피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부모를, 아내를, 남편을, 자식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죽은 뒤에도 명예롭게 매장해 주고(마태14,12),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야말로 그 믿음을 확인할 때입니다. 성녀 김루시아는 “저도 죽는 것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살려면 하느님을 배반하라 하시니 비록 죽음을 무서워하면서도 오히려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며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일상 안에서 소신 있는 믿음의 고백과 행동이 요구됩니다.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않는, 소신 있는 하루를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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