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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정일(미카엘) 주교님과의 소중한 인연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04 조회수626 추천수3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며칠전,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님이신 박정일 주교님과 직접 통화하였는데, 불과 한달여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당에 전혀 나가지 않았던 저였기에 이런 순간이 실로 믿기지 않으면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걸어온 신앙생활을 교우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신앙생활은 원래 개신교에서 출발하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 감리교에서 학습을 받았는데, 이 학습이란 천주교로 말하면 예비자 교리에 해당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학습받은 이후 6개월 이후면 정식으로 세레를 받으면서 감리교 신자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저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꾼 전환점은 바로 이러한 학습 이후에 일어 났습니다.

 

학습을 받은 때가 1978년 12월로 기억하며, 당시에 학습받으신 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사진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천주교 교우이셨던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하여 결국 개종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훗날 저의 영세대부가 되실 분과 함께 아버지와 제가 목사님을 뵈러 가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대부님의 본명도 가브리엘 대천사이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중3이면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므로 스스로 결정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으셨는데, 저로서는 하느님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천주교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인 1979년 3월 4일 주일에 천주교에 첫발을 내딛으니 그 곳이 바로 절두산 성당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올린 바와 같이 예비자 교리를 거쳐 수학여행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4일 홀로 상경하여 절두산 성당에서 오후 3시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으로 김몽은(요한) 신부님의 집전하에 영세를 받으니 어느 덧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와 더불어 고3이 되는 1981년 성주간의 예식에 참여 하면서 개인적인 체험에 의하여 결국 신학대학을 지망하게 되었는데, 입학할 당시 영세한지 3년이 되지 않았기에 1년을 일반학생으로 집에서 통학한 이후 2학년때 교구생이 되는 조건으로 입학이 되었는데, 당시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서울대교구 총대리 경갑룡(요셉) 주교님께서 많은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1년을 일반학생으로 다닌 후에 2학년 때 정식으로 교구신학생이 되었으며, 1985년 3월 4학년에 진학하면서 독서직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여곡절속에 다니던 학교생활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 왔으니 그것은 성적과 관련된 문제였는데, 당시 라틴어 성적이 문제가 되어서 학부는 졸업하였으나 결국 교구신학생에서 탈락이 되면서 성직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1986년 2월 7일 학부를 졸업하고 56사단 천주교 군종병으로서 복무한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였는데, 저의 의지에 의하여 학교를 그만 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조치에 의하여 성직자의 길이 좌절되었기에 사회생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으며, 늘 마음은  성직에 대한 미련이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 다니면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타교구를 비롯하여 전국에 있는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여 상담한 결과 교구나 수도원이나 일단 학교에서 그런 조치를 당하였기에 다시 사제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성직자가 아니고 수사를 지망한다면 받아줄 수 있는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러한 제안은 제가 받아 드리지 못하였으니 당시 저의 신앙심이 얼마나 나약하였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런 방황과 갈등의 세월을 오랜동안 겪다가 드디어 1995년 모수도원의 성소피정을 끝으로 더 이상 성직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게 되니, 공교롭게도 그 달이 성모성월인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성균관대 부설기관인 한국사서교육원에서 1년과정을 수료하고 준사서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저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게 되었으며, 1999년 결혼을 하여 현재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있습니다.

 

한편 학교에 다닐 때 가장 좋아하였던 한국천주교회사를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공부하지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후회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제 화제를 돌려서 말씀드리면 1992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시다가 행방불명되신 종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993년 재당숙의 판결문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게 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종조부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총 6명의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보훈처에 제출하였으며, 그중에서 2명이 지난 2008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신 바 있습니다.

 

아울러 위의 글에사 경갑룡 주교님과의 인연을 소개한 바 있는데, 신학대학을 졸업한 이후 시기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우연히 전철에서 당시 인천교구장님이셨던 나길모(굴리엘모) 주교님을 뵙고 대화를 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몇차례 뵌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주교님과 전혀 교류가 없지만 저로서는 나주교님과의 인연도 경주교님 못지 않게 지금도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지난 6월 28일 병원에서 대천사 부부를 뵙게 되면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미사참례를 다시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요새는 주위에서 권유한 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개인적으로 이벽 성조 시복,시성운동을 하고 있는 중에 바로 박정일 주교님과 통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창립자라 할 수 있는 이벽 성조가 선종하시는 과정에서 성격이 정확히 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서 아직까지도 복자,성인품의 반열에 오르시지 못한 점을 참으로 비통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야 어찌 되었던 간에 아직까지도 한국천주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벽 성조가 복자품에도 오르시지 못한 현실은 한국천주교회 전체가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이벽 성조에 관한 저의 글을 화정동 성당 홈피를 비롯하여 10여곳의 관련 사이트에 올린 바 있으며, 이와 병행하여 관련 서적도 틈틈히 읽고 있으며,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성모어머니의 모친이 되시는 성녀 안나의 축일이었던 지난 26일부터 시작하여 이벽 성조가 시복,시성의 영광을 받으시는 그날까지 묵주기도를 매일 바치기로 결심하였는데, 현재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점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과정에서 현재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님이신 박정일 주교님께 직접 저의 글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구체적으로  며칠 전 주교님의 멜주소를 마산 교구 홈피에서 입수하여 결국은 주교님께 메일을 보내 드렸으며, 뜻밖에도 주교님과 직접 통화하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교님께 메일을 보내 드리기 전에 좀더 철저한 준비를 하는 의미에서 마산교구 홈피에 있는 주교님 연락처로 전화를 드리니  주교님이 창녕에 머무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구청에 전화를 하여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관련부서와의 연결을 부탁드렸는데, 처음에는 연결이 안되더니 결국은 연결이 되었으며, 전화받으시는 분이 저의 느낌으로는 신부님으로 생각되었지만 따로 여쭤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신부님에게 감사한 점은 물론 저의 신원에 대하여 분명히 밝혔지만 그야말로 처음 통화한 사람에게 주교님의 메일도 확인하여 주시고 또한 창녕의 주교님 숙소의 연락처를 알려 주시니 그렇게 저를 믿어주신 그 신부님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주교님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입수한 이후 간단한 편지글과 이벽 성조 관련 글을 파일로 첨부하여 멜로 보내드린 이후 다소 긴장하기는 하였지만 드디어 창녕에 전화를 하니 어떤 연세드신 분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통화하면서 바로 이분이 박주교님이시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교님께 전화드린 취지와 멜을 보내 드렸다는 말씀을 드렸으며, 주교님이 저의 전화를 방갑게 받으셔서 저도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경갑룡 주교님,나길모 주교님에 이어서 세번째로 인연을 맺게 된 박정일 주교님과 처음으로 통화한 날이 대천사 부부를 병원에서 뵌지 정확히 한달이 되는 날이었으며, 이와 더불어 주교님의 본명도 미카엘 대천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웁게도 주교님이 그 다음 날에 친히 답장을 해주시는 정성을 보여 주셨으며, 103위 성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귀한 초상화를 파일로 보내 주셔서 참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이러한 주교님의 정성에 보답하는 마음에서 주교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 드렸습니다.

 

끝으로 박주교님은 은퇴주교님으로서 86세라는 고령이심에도 불구하시고 한국 천주교의 시복,시성에 관련된 총책임자 주교님이시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고령이심에도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중책을 수행하고 계시는 박주교님에게 경의를 표하며, 교우 여러분께서도 박주교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11년 8월 1일(월)  문 암   박   관   우(토마스 모어)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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