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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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8-09 | 조회수33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1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집 뒷곁 아주 작은 공간에 어머니께서 고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싹이 나지 않아 걱정하십니다.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 씨앗이 땅에 스스로를 열고 허물어지기를 기다리는 일과 같습니다. 열매로서가 아니라 또 다른 모습의 근본이 되는 일이 땅에 심어진 씨앗에게 바라는 농부의 소망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밀알에 관한 말씀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을 이 밀알 하나에 담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이 친숙한 비유에서 우리가 밀알 하나에 빗대어 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는 이가 아닌 뿌려진 씨앗의 입장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알 수 있기에 실제 고민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이 있습니다. 열매를 꿈꾸는 농부에게 이 밀알은 새로운 풍성한 곡식의 희망이 되지만 씨앗으로 여겨지기 전까지 이 녀석은 분명 하나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이 밀알이 훌륭한 결과로서 자신을 지키려면 그 혼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지켜갈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져 덮이면 그 결과는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의 시작이 될 뿐입니다. 자신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씨앗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풍성한 열매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로서 만족한 삶을 원하는 이에게는 피하고 싶은 일일 뿐입니다. 자신의 훌륭함 지키려하는 이에게 이 비유는 너무 쉽지만 듣기 싫은 따를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고민을 예수님은 비유의 짧은 말씀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풀어내십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해도 이 시도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에 힘을 잃고 맙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달콤하게 들리지만 그 전제 조건이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알면서도 주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하는 중이며, 그 사랑을 채워주는 가장 크신 분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중이기에 이 말씀은 알아듣기는 하여도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기를 바라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 입으로 두 말하시는 예수님이 아니시라면 이 말씀은 모든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썩는, 혹은 죽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놀랍도록 직접적인 설명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마취시키는 세상의 이치에 정면으로 맞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조차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속마음으로 '그 말씀은 아닐거야'라고 잠시 뒷걸음질 치며 달리 말씀을 보려 노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설명에 당신을 넣어 설명하시며 이야기를 완성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밀알로 시작한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비유로 시작해서 가르침으로 발전한 이야기. 그래서 이해하는 것으로 그만일 수 있는 이야기가 우리의 목숨을 놓고 갈등하게 만드는 이야기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이제는 예수님 당신으로 바뀌면서 우리는 이 밀알이 예수님 당신처럼 살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말씀일 수 있고, 가르침은 가르침일 수도 있지만, 사람의 삶은 이상적인 답이나 꿈으로 말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밀알 하나의 가르침은 결국 예수님 당신처럼 살라는 이야기이며, 예수님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해석이 아니라 보고 따르는 것 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제가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켜 살아가는 일.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지만 하느님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정해진 한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밀알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나는 된다, 안된다는 스스로 결정하기 나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어야 합니다. 좋고 싫음과 관계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앙의 길은 우리가 죽음으로써 생명을 싹틔우고 또 다시 풍성한 삶이 열리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훌륭한 하나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그 모습으로 보여지지도 않을 겁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나도 아닌 이름으로 내 공로의 몫을 다 차지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죽을 힘으로 아니 죽어서 그 모든 것의 뿌리와 줄기와 잎이 될 지언정 사람들은 그 열매의 이름으로 나를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결코 죽어지지 않을 나지만 모든 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위해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그리고 그 모든 것과 평생을 살면서 웃을 수 있는 삶이어서 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이 사랑하신 그 사람들이 내민 십자가라는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 죽음을 넘어 당신이 다시 사실거라는 희망을 품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이가 보게 될 십자가라는 나무와 그 끝에 열리는 부활이라는 또 다른 삶의 열매를 통해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참 뜻을 깨닫고 구원을 향해 가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죽음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은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는 죽을 만큼이 아니라 죽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당신처럼 사랑하게 만드신 분이 되셨습니다. 사랑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밀알은 그리스도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이 밀알의 삶을 우리가 따라야 함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하지도 못할 가르침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하며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겨우 남은 것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을 봉사, 희생이란 이름의 사랑을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쉽게 내미는 것은 그분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자기 목숨을 사랑하며 사랑을 말하는 이들은 빛나는 십자가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잘 보며 밀알의 가르침을 새겨 들어야 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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