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지막 카드는 아직 제시 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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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웅열 | 작성일2011-08-11 | 조회수32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15) 마지막 카드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입을 다물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 계속 자신의 무죄를 부르짖으며 친구들에게 쏘아붙인다. 고통이 징벌이라고? 자네들의 같잖은 위로는 괴로움만 더해 줄 뿐, 그 헛된 말은 끝도 없구나. 드디어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느님은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이중구조 안에서 말씀하신다. 먼저 하느님은 욥의 친구 엘리파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내 분노가 타오르니,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욥42,7) 하느님은 욥의 편을 들면서, 욥의 고통을 인과응보로 해석하는 친구들의 변론을 질타하신다. 하느님은 욥한테도 ‘하늘과 땅’, 곧 근본적 창조에 대해 묻기 시작하신다. 욥이 전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하느님은 원초적 물음을 폭포처럼 쏟아 부음으로서 가련한 욥을 압도하신다. 사실 하느님은 풍자적 질문 공세로 욥을 압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욥아, 네게 애걸하는 이 마음을 모르겠느냐? 나를 믿어라,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 어떻게 네가 나의 세계와 가능성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욥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심했던 점을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한 점을 들어 질책하고 계신 것이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 근거 없는 말로 우주 계획을 엉망으로 망쳐놓은 자가 누구이냐? (욥38,2참조) 하느님은 여기서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를 다 알고 있는 듯한 욥의 태도를 문제 삼으신다.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욥과 마찬가지로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해도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분의 가능성이나 능력은 우리의 것과 같지 않고, 마지막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마치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기가 병풍의 수를 놓는 엄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기는 수를 놓는 뒤쪽, 곧 실밥으로 뒤엉킨 쪽만 본다. 그 아기는 일어서서(부활!) 앞을 건너다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헝클어진 반대편에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다 해도) 하느님이 벌을 주시는 심판관이나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고통이라는 걸림돌” 오늘의 묵상 :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하느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의 만족은 하느님의 만족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 속에 시간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3,10-11) 따라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들의 시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에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허둥거리고 조급해서 안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고 기다려라!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라 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느 농촌마을에서 들리는 소리로: “이곳에서는 기도하면 언제나 비가 온다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희망하고 바라는 것을 끝까지 기도하여 얻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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