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와 삶 - 8.1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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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8-14 | 조회수39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8.14 연중 제20주일 이사56,1.6-7 로마11,13-15.29-32 마태15,21-28
기도와 삶
오늘은 ‘기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막교부들의 일화를 인용합니다. 이들에게 기도란 매일 일정분량 시간의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 자체였습니다.
아가톤 아빠는 “기도는 힘든 일이자 마지막 숨넘어갈 때까지의 위대한 투쟁이다.” 라고 말합니다.
팜보 아빠는 임종 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사막의 고독에 들어와 내 집을 짓고 그 안에 산 이후 지금까지, 내 손으로 일해서 얻지 않은 양식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고, 누구에게 유감이 된 말 역시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 가려하니,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아직 시작도 안한 이와 같구나!”
참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인 기도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사랑처럼 늘 기도해도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 또한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가 삶을 만들고 삶에서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가 삶이 되고 삶이 기도가 되어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될 때 기도의 완성이요 삶의 완성입니다. 하느님 없이, 기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위태한 일인지요.
믿던 믿지 않던 어떤 형태로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육신이 밥을 먹고 숨을 쉬듯이 영 혼도 기도의 밥을 먹고 기도로 숨을 쉬어야 비로소 영육의 건강입니다. 기도가 없는 삶은 말 그대로 하느님 방향을 잃은 삶이라 혼돈 속의 방황입니다. 기도해야 합(삽)니다. ‘살기위해’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기에 여유와 방향을 잃고 무의미와 혼란 중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열려있는 기도의 집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섬기는 이방인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집인 이 수도원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 주님의 종이 되려는 우리를 거룩한 산, 기도의 집 요셉수도원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기도는 소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소통의 대화입니다. 모든 영육의 병은 불통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해야 이웃과의 소통도 원활해져 영육의 건강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의 소통의 기도가 눈물겹습니다. 소통을 위한 노력이 참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위해 잘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서로간의 오고가는 대화입니다.
오늘 가나안 부인은 소통의 대화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예수님의 냉대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 모든 시련을 겸손의 계기로 삼으니 말 그대로 전화위복입니다.
겸손과 소통은 함께 갑니다. 겸손의 밑바닥에서 주님과의 완전 소통으로 주님의 응답을 받는 가나안 부인입니다. 마침내 가나안 부인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하신 주님의 치유선언입니다.
가나안 부인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로 주님과의 완전소통에 성공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합니다. 주님과의 소통의 기도가, 믿음이 좋아야 영육의 치유와 건강입니다.
기도는 싸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싸움이자 동시에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싸움입니다. 그러니 평생 이런 싸움의 기도에 항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그대로 기도는 싸움임을 보여줍니다. 주님과의 3라운드 게임입니다만 우리의 기도 싸움은 3라운드가 아닌 끝없는 싸움입니다. 겸손의 싸움, 믿음의 싸움, 기도의 싸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인의 청에 주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니 냉혹하기가 마치 철벽처럼 느껴집니다. 이어 나온 주님의 말씀도 참 절망적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주님과의 싸움에 지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두 번째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간청하는 가나안 부인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보다 모욕적인 말은 없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겸손의 한계에 도달하여 자존심이 상해 포기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싸움이자 동시에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부인은 겸손의 무기로 주님과의 싸움과 자기와의 싸움에 동시에 승리했습니다.
바로 다음 가나안 부인의 고백이 영적전쟁의 승리에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런 겸손이라면 백전백승입니다. 기도와 믿음이 겸손 안에 하나로 모아집니다. 겸자무적(謙者無敵)이란 말도 쓸 수 있겠습니다.
언젠가 들은, 가끔 인용했던, 세상 한 복판에서 기도로 살아가는 어느 자매의 체험적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 살아남는다.”
이 말을 인용할 때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해 기도입니다. 기도는 소통입니다. 기도로 하느님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기도는 싸움입니다.
겸손의 무기를 지니고 평생 하느님과 나와 싸워야 하는, 죽어야 끝나는 기도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겸손히 당신의 도움을 간청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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