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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핑계 댈 것을 핑계 대야지 -반영억신부-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18 조회수599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1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말씀의 초대

 판관 입타는 창녀의 아들이었고 힘센 용사였다. 암몬 자손들과 싸움을 앞두고 주님께서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시면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첫 사람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딸이 나온 것이다. 입타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려고 그 딸을 희생시킨다.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던 고대의 이러한 관습은 후대 예언자들의 비판을 받고 율법에서 금지된다(제1독서). 하늘 나라 잔치에는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지만 반드시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 예복은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내적 태도를 말한다. 의로움이나 겸손 또 선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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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그런 곳에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별 이유 없이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오라고 했지만 역시 거절합니다. 심지어는 심부름꾼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임금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른 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임금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에 불림을 받았지만 충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이 하늘 나라의 초대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 베푸는 잔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는 기쁨입니다. 신랑 신부가 새 출발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임금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혼인식에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 잔치에 참석하는 이가 입어야 할 예복이었습니다. 모르기에 대충 살아갑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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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앞날을 모릅니다. 알려고 애를 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알게 되면 삶의 의미는 반감되고 맙니다. 고통과 시련을 만나도 끝을 보기에 덤덤해집니다. 성공을 거두어도 결과를 알기에 싱겁습니다. 희망은 미래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은 거부합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습니다. 임금을 무시한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임금은 잔치를 계속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바꾸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찮은 이유로 거절해도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부르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선택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내려집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그것을 알리는 예화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잔치는 기쁜 자리입니다. 혼인 잔치는 신랑 신부가 새로운 출발을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초대를 받은 우리 역시 ‘새 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잔치에 참석하는 이가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현실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입니다

 

  

 

핑계 댈 것을 핑계 대야지

  -반영억신부-

성모승천대축일에 청주교구 운동동성당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대축일에 봉헌식을 하니 바쁜 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더욱이 신자가 아닌 지역대표들도 참석을 하여 축하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고생한 신자들과 동료신부를 위로해 주는 자리였는데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잔칫집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초대한 분으로부터 오래도록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 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귀한 선물은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제가 이번 대축일을 맞이하여 ‘손 십자가’를 선물로 드렸는데 못 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평상시 미사참례를 잘 하시다가 모처럼 빠졌는데 하필이면 이 날 선물을 주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순례지를 찾아 기도하러 왔다가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13,32)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느님 사랑이요, 옆으로는 이웃사랑입니다. 매일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이웃사랑에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꼭 챙겨야 할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설사 꼭 가겠다고 생각하다가도 하필이면 다른 일이 생겨 일정을 놓치기도 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 핑계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cafe.daum.net/rara63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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