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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2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2 조회수369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8월 22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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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잘못에 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꾸지람이 오늘 복음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입에 올리기도 힘겨운 모습들이 펼쳐지면서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잘못되면 그들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이 잘못 전달되게 마련이고 그들의 삶에서 떨어져 나간 하느님의 진리는 그냥 책이나 그들의 현란한 입에서만 맴돌고 말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잘못 보다도 예수님이 첫마디에서 그들의 가장 위험천만한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갔다는 표현입니다. 모든 이들이 현세에도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하지만 결국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위해 살고 있는데 천국을 가르치는 이들이 그 나라의 문을 닫았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게다가 자신들도 들어가려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놀랄만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늘 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 미루어보더라도 말입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들이 하늘 나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하나 같이 모두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공식 만큼이나 많은 것이 그 나라는 정말 들어가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 말하지만 하느님의 서릿발같은 심판을 가르치며 구원 앞에 전전긍긍하게 만듭니다. 천국은 보이지 않는 곳처럼 멀어보이나 지옥은 눈 앞의 불구덩이로 존재하며 상시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나마 자신들은 되고 다른 이들은 안된다는 논리마저 펼칩니다. 만약 내가 천국을 가는데 사람들의 찬반을 묻는다면 어딘가 내가 몸담고 있는 종교 이외에 누군가는 그 천국의 길을 막아서고 반대할 것이 뻔한 세상입니다. 길을 다니며 받게 되는 천국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을 보면 나는 이미 지옥에 문 앞까지 들어서서 길을 전환하지 않으면 뻔한 불구덩이의 미래와 현실의 지옥 같은 삶으로 빠져듭니다. 

행여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마음 먹은 이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교회에 나와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하면 그 열심히 바뀌어 생각과 입은 하늘 나라를 현실의 가치는 지독한 독선과 맹목적 헌신으로 향하는 일들도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게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누군가는 가르쳤을겁니다. 입으로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랑은 하늘에 띄워놓고 현실은 무서운 심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살도록 사람들을 종용하는 문화는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문화일 수는 없습니다. 혹 하느님이 아닌 세상의 왕이 되기 위한 싸움판에서나 자연스러운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렇게 하느님을 배경으로 삼고서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하늘 나라를 만들고 다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고 만드는 세상에 그 하늘 나라의 주인이 서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렇게 한 장본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하늘 나라 대신에 찾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사랑 대신에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 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열심하다는 신앙생활이 지니고 있는 재물로 평가되고, 하느님의 축복이나 은총의 방향도 그들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세상입니다. 그 재물을 교회에 내는 정도에 따라 하느님의 마음이 바뀌고 있는 세상입니다. 당연히 성전에 바쳐지는 금과 예물이 풍성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바쳐지는 것 중 얼마를 하느님이 가지실까요? 그게 하느님께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지금의 우리 모습의 많은 부분은 성전을 하느님이 계신 유일한 곳인듯 만들고 그 안에서만 기도하고, 거기에 바치는 것으로 천국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의미가 변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성전도 크기에 따라 지도자에 따라,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가치로 따져지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적인 규모와 가시적인 크기는 하느님 은총의 척도가 되고 신자들의 열심을 드러내는 눈에 보이는 증거로 뒤바뀝니다. 물론 거기에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명예가 되고 아울러 따르는 많은 것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나쁘게도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다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전이란 우리들만 안락을 누릴 수 없다며 하느님께 지어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곳으로 성전은 우리 안에 세워졌습니다. 시작은 그랬습니다. 바쳐지는 예물은 우리의 정성과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뉘우침으로 하느님께 전해졌고 사는 처지에 맞춰 동일한 가치로 하느님께 올리는 정성입니다. 또한 거기에 공동체가 함께 살기 위한 몫으로 내어 놓는 것이 그 재물의 원래 가치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문화가 계속될 때 우리 안에 서 계신 하느님은 점점 그 성전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 되십니다. 복음 속의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지옥의 사람들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드는 세상에서 이렇듯 성전에서 상상할 수 없는 분으로 서 계신 것 처럼 말입니다. 

복음 어느 곳에 예수님께 정성을 바쳐 은총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예물을 보시고 감동하시어 사람을 끌어 안으셨습니까? 그분 곁에 칼날같은 심판이 언제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피하려는 이들 가까이에 그분이 계셨고 그들의 가슴아픈 사연에 예물도 금도 댓가로 지불되지 않습니다. 


진짜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시는데 그분의 사람들은 그분 이름 앞에 놓여진 사람들의 피눈물나는 정성을 받아 하느님을 설명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당장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천국의 그림을 놓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란 굴욕과 굴종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그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하느님께서 그런 이들을 허락하여 꾸미시는 천국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이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려운 천국을 가르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손에서 하늘 나라의 열쇠가 베드로와 같은 이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자신들을 의인이라 부르며 수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던 그들에게서 자신의 삶조차 책임지지 못하고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주님에게서 등조차 돌리는 베드로에게 흔들리지 않은 하느님의 신뢰가 주어진 것입니다. 


2천년을 한 번에 쳐다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2천년 전의 시선이 지금 우리의 삶을 볼 수 있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읽기에도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 고쳐지지 않는 것, 그렇게 천국이 여전히 멀고 힘든 곳으로 만든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삶의 가치를 하느님의 진리 앞에 바로 세워야 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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