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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 -반영억라파엘신부-(마르6,17-2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9 조회수54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 축일은 4세기 그의 유해가 있는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시작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대부분의 삶을 광야에서 보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은 헤로데의 불륜을 질타하다가 헤로디아의 간계로 참수된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마르6,17-29)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그의 입에 말을 담아 주심으로써 말씀을 전할 자격을 부여받은 예언자가 된다. 예언자로서 앞으로 당할 고난의 삶을 예고하시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주신다(제1독서). 요한이 헤로데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여 살고 있는 것에 충고를 하자,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둔다. 요한은 헤로디아의 간계로 헤로데의 생일 잔치의 제물이 되어 희생된다. 권력의 비윤리와 폭력성,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악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복음).

복음의 헤로데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북쪽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유명한 ‘헤로데 대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메시아의 출현으로 여겨 죽이려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잔인한 성격으로 보아 능히 그랬을 것입니다.
말년의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아내와 장남까지 처형하는 광기를 드러내다가 죽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은 삼등분되었고, 그의 아들들이 다스렸습니다. 북쪽의 갈릴래아 지방을 맡았던 아들이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안티파스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이복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가까워졌습니다. 왕이 되자, 그는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그녀는 ‘마카베오 가문’의 공주였던 ‘미리암’의 딸로, 정통 유다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데 가문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의 혼인으로 신분 상승을 원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죽음을 원하는 아내의 청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묵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사람의 공모로 살해된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지를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 

 -반영억라파엘신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빛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헤로데 왕은 똑똑하고 잘 난 것 같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진짜 바보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와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부로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26,24) 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결국은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마침내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했던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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