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eleēson hēmas, 마태 9,27).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비를 호소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17 참조)와 ‘동방 박사들의 방문’(2,1-12 참조)으로 알려 준다. 그런데 눈먼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눈먼 이들은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에 관해 듣고 그분을 믿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또 “눈먼 사람들은 믿었기 때문에 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보았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라는 푸아티에의 힐라리오의 해석은, 당시의 유다인들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전례에서 그분의 구원 신비를 기념하면서도 열정이 약한 우리의 신앙을 질책하는 것 같다. 이렇듯 주님께 청하는 과정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고백과 자비에 대한 청원으로 이루어진다. 미사의 시작 예식에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호경을 바치고 축복의 인사를 나눈 후에 참회를 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청했던 자비를 ‘자비송(Kyrie)’으로 노래한다. 자비송은 원래 로마나 그리스 사회에서 신도나 군중이 신이나 황제 또는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환호였다. 태양신을 섬기던 고대의 동방인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허리를 굽혀 절하며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외치곤 했다. 성경에서 볼 수 있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성장하던 헬레니즘 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자비송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사의 구성 요소로 서서히 자리 잡는다. 4세기 말경에 기록된 《에테리아 여행기》에는 예루살렘에서 바치던 ‘저녁 기도’ 중에 부제(副祭)가 기도 지향을 말하자 소년들이 매번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하고 환호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안티오키아와 다른 동방 교회에서도 미사나 성무일도 중에 간청 기도와 ‘키리에’로 구성된 호칭 기도 형식의 기도를 바쳤다. 이런 점으로 봐서 5세기에 동방에서 먼저 전례 환호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서방 교회는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동방에서 순례자들을 통해 ‘키리에’를 받아들여 성무일도와 미사 때 불렀다. 젤라시오 교황(492-496년) 때는 ‘자비송’이 기도 지향을 말하고 ‘키리에’로 응답하는 형태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년) 때에 ‘키리에’와 ‘크리스떼(Christe)’가 지향이나 간청에 대한 응답이 아닌 순수한 독립 환호로 현재 위치에 정착되었다. 8세기 이전에는 키리에 세 번, 크리스떼 세 번, 다시 키리에 세 번으로 총 아홉 번이었다. 아마도 세 번은 신적 거룩함을, 아홉 번은 구품 천사를 상징한 것 같다. 그런데 중세의 저명한 전례 해설가 메츠의 아말라(850년경)가 ‘첫 번째 키리에는 성부께, 두 번째 크리스떼는 성령께 올리는 환호’라고 그릇되게 해석하여 오랫동안 그렇게 인식되기도 했다. ‘키리에’는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성경이나 초세기 문헌을 보면 그리스도를 대부분 ‘주님’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사도 교회의 유명한 그리스도 찬미가인 필리 2,11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이다. 루카 2,11에서 천사들이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에도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요한 21,7)라고 말한다. 미사의 기도문은 일반적으로 성부를 향하지만 ‘자비송’과 축성 후의 ‘기념 환호’, ‘하느님의 어린양’은 모두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이다. 현행 <미사경본 총지침> 52항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자비를 청하는 자비송을 두 번씩 부르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언어적 특성이나 음악적 형식 또는 환경을 참작하여 여러 번 반복하거나 짤막한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가능하면 공동체 전체, 곧 교우들과 성가대 또는 교우들과 선창자가 교대로 노래하기를 권한다. 자비송은 참회 예식에 속한다. 참회 예식은 우리가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점, 그것도 지속적으로 청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거행하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신비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동참하려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위해 우리는 모든 전례의 시작부터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행동 때문에 죄가 많아진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례를 거행하기 전에, 알면서도 범한 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자책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위대하신 분의 현존 앞에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우리는 자기 죄로 인해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자비를 청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물을 기쁘게 찬양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 18,13 참조)를 자비송과 연결하여 묵상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송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환호이자 그분이 보여 주신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이다. 그런 면에서 자비송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은 ‘대영광송(Gloria)’이라 할 수 있다.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4월호(통권 457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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