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속 성경 한 말씀] 네 복음서의 상징(묵시 4,7; 에제 1,5-12 참조) 어릴 적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쓸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별명입니다. 저는 ‘종식’이라는 이름 때문에 ‘식인종’이라고 불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나라와 도시에도 이른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 탑’,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이집트 카이로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등은 그 지역을 상징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묵시적 네 생물 구약성경에서 환시와 상징적 행동, 말씀을 통해 예언직을 수행하던 에제키엘은 주님 곁에 있는 네 생물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커룹마다 얼굴이 넷인데, 첫째는 커룹의 얼굴이고, 둘째는 사람의 얼굴, 셋째는 사자의 얼굴,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에제 10,14). 여기서 커룹(kerub, 복수 ‘케루빔’)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아카드어 카리부(karibu)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얼굴을 묘사한 내용은 찾기 힘듭니다. 성화에서는 대개 사람의 얼굴로 그려졌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네 생물이 언급됩니다.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묵시 4,6ㄴ-7). 네 생물의 순서와 그중 한 생물이 바뀌지만(커룹 대신 황소) 에제키엘이 말한 네 생물을 연상시킵니다. 네 생물의 상징으로 표현한 각 복음서의 특징 교부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묵시적 생물들로 네 복음서의 특징을 서술하였습니다. 이 네 동물을 네 복음사가에 처음 적용한 이는 리옹의 이레네오(130/140-202년) 주교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이단 반박》에서 ‘사자’는 하느님 아들의 역사하심과 지도력과 왕권을, ‘황소’는 그분의 희생적이며 사제적인 직분을, ‘사람’은 인간으로 오신 말씀을 분명하게 묘사하며, ‘독수리’는 교회 위에 날개를 펴고 맴도는 성령의 선물을 가리킨다고 서술합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여러 면이 조화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앉아 계신다고 하면서, 각 복음서의 특징을 네 생물과 연결하였습니다. 베자의 아프링기우스(6세기)는 《묵시록 주해》에서 앞선 교부들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였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를 해석자들은 대부분 이것이 마르코 복음사가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 그의 복음서가 이런 말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르 1,1-2). 여기서 말라키 대신 이사야의 글이 인용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분명 말라키서에도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님의 구원’을 뜻하고, ‘말라키’는 ‘천사’를 뜻합니다. …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는 루카를 이야기합니다. 황소는 사제직을 나타내며 이사야서에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길이 닿는 곳마다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놓아 기를 수 있으리니 너희는 행복하여라’(이사 32,20). 그래서 루카는 복음서 첫머리에서 사제 즈카르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루카 1,5).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는 마태오를 가리킵니다. 마태오는 복음서 맨 처음에 육에 따른 주님의 족보를 알리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는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주님의 인성이나 사제직 또는 광야에서 설교하는 요한의 이야기로 복음서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 높은 곳에 가 닿는 독수리처럼 되고 싶어, 낮은 것을 모두 버려두고 하느님이신 그분에 대해 곧바로 이야기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상징들의 의미 교부들은 시작 부분에서 각 복음서의 특성을 뽑았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기에 사람으로 표상됩니다. 마르코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기에 포효하는 백수의 왕, 또는 눈을 뜨고 잠을 자기 때문에 늘 깨어 있다고 보아 무덤에 깃든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사자로 표상됩니다. 루카는 사제 즈카르야 이야기로 시작하기에 성전의 희생 제물로 쓰인 황소나 송아지, 또 신약의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황소로 표상됩니다. 요한은 창세 이전부터 천상에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찬가로 시작하고 말씀의 영원한 세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마치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독수리를 연상시키기에 독수리로 표상됩니다. 이 신비한 네 생물은 하느님의 아드님의 일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태오의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그분의 강생을, 루카의 ‘황소’는 최고의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마르코의 ‘사자’는 부활을(사자가 죽은 새끼를 사흘 뒤에 살린다는 고대 전승에 따라), 요한의 ‘독수리’는 그분의 승천을 나타냅니다. 이 네 상징은 더욱 확대되어 구원에 필요한 여러 덕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성적 동물인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인간이며(사람), 물질적 만족을 희생하고(황소), 강인함을 드러내며(사자), 영원을 관상해야 합니다(독수리). 교회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전통적으로 독서대의 네 기둥에 이 생물들을 새기거나 적어도 복음서를 놓는 보면대는 독수리 형상으로 꾸몄습니다. 교회는 네 생물이 그러하듯이 그분을 영원히 찬미 찬양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묵시 4,8).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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