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속 성경 한 말씀] 마리아의 노래,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비천한 종의 노래(루카 1,46-55)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표사유피 인사유명 豹死留皮 人死留名)”라는 말처럼,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삶에 따라 이름만 남습니다. 남성은 대개 자신의 업적과 글을 통해 이름을 남기지만 여성은 남편이나 자녀의 명성에 의해 업적과 생애가 전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자녀로 인해 명성이 드높여진 어머니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성인 중에는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 모니카, 구약에서는 사무엘 예언자의 어머니 한나, 신약에서는 구세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첫 장을 읽다 보면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에서 여러 주인공이 구원의 찬가들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두 여인인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아기인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아인 카렘은 동정녀 마리아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찬가가 울려 퍼지는 은총의 장소가 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루카 1장에는 찬가 세 편이 등장합니다. 그중 첫 번째가 엘리사벳의 찬가(루카 1,42-45)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을 방문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인사 형태를 띤 찬가를 부르는데, 이 노래가 성모송의 전반부를 이룹니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친척인 마리아를 향해 찬가를 부르는 것이 다른 찬가와 다른 점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단순히 육적으로 구세주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리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노래합니다. 이 찬가에 응답하여 마리아는 두 번째 찬가(루카 1,46-55)를 부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일임을 밝히며 찬미와 찬양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세 번째는 즈카르야의 찬가(루카 1,67-79)로, 즈카르야가 다윗 가문에서 구원자를 일으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평화의 길로 인류를 이끄실 분이 오심과 자신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이 그 길을 준비할 인물임을 노래합니다. 이 가운데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의 원형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1사무 2,1-10 참조)인데,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나 하느님께서 청원을 들어주셔서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된 여인입니다. 이로써 마리아가 사라, 레베카, 라헬, 한나 등과 같이 구약의 축복받은 어머니들의 대열에 속한다는 것이 암시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이 되는 아들을 낳은 것처럼 마리아도 그러한 아들을 낳도록 하느님께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루카 복음서는 이 노래를 통해 동정녀 마리아가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참된 신앙의 모범이심을 드러냅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자들(anawim)’ 곧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는 뒤쳐졌지만 신앙심만은 돈독하여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둔 이들이 지닌 희망을 명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희망이 바로 루카 복음서의 주요한 가르침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모범적인 신앙인을 넘는 첫 번째 복음 선포자로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노래는 내용상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되고, 메시아의 도래는 ‘가난한 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찬가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46-50절)은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그 이유, 하느님의 거룩함과 자비를 묘사합니다. 둘째 부분(51-53절)은 대조적인 두 집단, 세상의 기득권을 누리는 교만한 자와 통치자, 그리고 부유한 자들로 표현된 집단과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로 표현된 소외된 변두리 집단을 구별하여 대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묘사합니다. 셋째 부분(54-55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시편 136에서 서술한 창조와 이집트 탈출 사건, 이스라엘 조상 대대로 겪은 하느님의 자비 체험을 묘사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마리아로부터 이스라엘에게로 초점이 전환되는데, 이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입은 한 개인을 넘어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는 비천한 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종말론적이고 구세사적인 차원으로 발전되었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는 신앙인에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묵상하고, 마리아의 모범적 태도와 복음 선포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도록 촉구합니다. 이 찬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 곧 당신 종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주님’, ‘구원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며 믿는 이들입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비되는 자들로 이승의 삶에 만족하고 이웃과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이 찬가는 최초의 감실인 동정녀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 이루어진 신앙고백이며 최초의 복음 선포입니다. 교회는 시간 전례에서 저녁기도의 복음 찬가에 이 찬가를 배치하여 매일 저녁 마리아의 신앙고백과 복음 선포를 통해 영적 양식을 얻습니다. 하느님의 비천한 종인 마리아를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 곧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구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자임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한다면 동정녀 마리아처럼 행복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9-50).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 윤종식 티모테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