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을 맞는 첫 날, 매년 마음 속으로 가을을 시작하는 오늘, 여름 내내 좀 멀리하고 있었던 책을 다시 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얇디 얇은 이탈리아어판 '어린 왕자'를 들고 집 앞의 셈피오네 공원으로 향했다.
나뭇그늘 밑의 벤치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저 만치 지나가던 젊고 매력적인 아시아 여성(처음에는 인도 여성인줄 알았다.)이 내 옆의 벤치에 앉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왔는데요, 당신은요?"
"한국사람이세요? 반가워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왔어요. 그런데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은 다 똑같이 생겨서 구별을 못하겠더라구요.
한국은 물가가 비싸나요? 스리랑카 사람이 한국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나요? 한국에서는 영어 써요?......"
그 말칸티(정확한 발음은 아니겠지만)라는 이름의 자매님은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계속해서 한국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곧이어서 내가 지금 사는 곳은 어디며, 혼자 사는지, 그리고 직업이 무엇인지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속으로 '지금 이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어서 작업 중인건가?' 하고 생각하고는 계속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경계의 눈빛과 함께 무뚝뚝하게 대꾸만 했다.
그런데도 그 자매님은 쉴 새 없이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물어왔다. 한참이 지나 그녀는 내게 시간을 묻고는 깜짝 놀라면서 처음 만났을 때의 활짝 웃는 웃음과 함께 한 마디 말을 하고 떠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마터면 일하는 시간에 늦을 뻔 했네요. 며칠 전 스리랑카의 집에 전화를 했더니 남동생이 한국에 돈 벌러 떠날거라고 해서 너무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은게 많았어요. 고마웠어요. 안녕히... 참 겨울에는 많이 춥나요?"
동생보다 먼저 이탈리아라는 땅으로 건너와 남의 집 가정부 살이를 하면서 많은 멸시와 설움을 느꼈을 누나가 이제 동생이 한국이라는 낯선 땅으로 또 돈을 벌러 떠난다고 하니 얼마나 궁금한 게 많았을까?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혹은 한국인인지 구별할 수가 없어 그 쪽 사람이다 싶으면 말을 걸어서 확인해 본 사람이 그 며칠 동안 몇명이나 됐을까?
한국의 겨울이 춥다는데 얼마나 춥다는 건지 누나의 마음은 또 얼마나 궁금했을까?
그녀가 떠나고 휑하니 느껴지는 공원 벤치에서 갑자기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나의 '쌀쌀맞고 성의없는 대꾸'에 대한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혼자 사느냐고만 묻지 않았더라도 안 그랬을텐데... 그걸 왜 물어......"
내가 사제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주 작지만 슬픔이 전해져 오는 어깨짓 하나에도 섬세한 배려를 하며 살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오늘 또 커다란 어깨짓 하나를 무시하고 말았다.
보고 싶은 데로 보지 않고 보이는 데로 보자며 눈을 감은것도 수백번이건만 나는 오늘 또 내가 보고 싶은 데로 멀리 동생을 이국땅에 떠나 보낼 누나 대신 한 여자를 보고 있었다.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작은 일을 하려는 사람은 적다. 주님은 일은 대부분 작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드러난다.
가을이 시작되는 첫 날. 작고 사소한 일을 통해 주님의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이기를 기도해 본다.
그녀를 떠나 보내고 읽은 '어린 왕자'의 끝부분에서 어린 왕자가 내게 야무진 입술로 한 마디 하고 있었다.
"Da te, gli uomini", disse il piccolo principe, "coltivano cinquemila rosse nello stesso giardino... e non trovano quello che cercano..."
"네 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똑같은 정원 하나에 장미를 5천 송이나 키우지만... 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어."
"Non lo trovano", risposi.
"찾지 못했지." 내가 대답했다.
"E tuttavia quello che cercano potrebbe essere trovato in una sola rosa o in una un po' d'aqua..."
"하지만 그들이 찾아 헤매는 모든 것은 장미 한 송이나 물 한 모금에서도 찾아 질 수 있는데......"
"Certo" risposi.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E il piccolo principe soggiunse: "Ma gli occhi sono ciechi. Bisogna cercare col cuore".
그러자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하지만 눈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 마음으로만 찾을 수 있어."
어린 왕자와 함께 떠난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 다시는 이 물음이 결코 작은 것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기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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