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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교자성월 / 103위 그림 성인전
작성자김미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1 조회수379 추천수4 반대(0) 신고

 

 

103위 그림 성인전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 바오로는 1839년 기해 박해로 체포될
때 도감(都監)의 병정이었다. 1839년 8월경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처음엔 잘 참았으나 하루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곧 배교를 취소했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후 허협 바오로는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고,
1840년 1월 30일 45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옥사, 순교했다.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냈다.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55는 아내)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瑞山)
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9월 말 홍병주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
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7출)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하여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홍병주는 끝까지 버터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68은 동생)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 베드로와 결혼하면서 냉담했던 생활을 떠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와 성체성사를 받고부터는 더욱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6월 손소벽은 가족과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주뢰 3차,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로 순교했다.
(50은 남편, 70은 딸, 40은 사위, 50, 70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
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
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
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2, 67과 함께 체포됨)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6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56은 언니, 46. 47. 56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 아가타는 어려서 아버지 권 진사가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따라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와 함께 입교했다.


13세 경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그후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의 간교로 어머니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는 이경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권진이는 이경이와
함께 사관청을 탈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 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교했다.
(52는 어머니, 52, 65와 함께 체포됨)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형 홍병주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후 9월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63은 형)



일명 ‘경천’으로도 불리는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 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독신생활을 원하였으나 양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어린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에서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체포된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되었다.


이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
하지 않을 수 있는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
들을 재촉해서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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