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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0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2 조회수32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9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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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되고 배운 것들이 이제는 몸에 붙어 있는 일상생활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교리를 통해서 배웠고, 또 어떤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습 속에서 듣고 보고 배운 것도 있습니다. 나이가 자라고 교리라는 것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게 된 나이에는 같은 교리 속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의 삶에서 일방적으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들은 이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람들이 형성한 그리스도 문화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데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분명 이 모든 것의 뿌리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시간을 통해, 그리고 그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거치는 동안 어떤 것은 유지되고 어떤 것은 새롭게 고쳐지는 과정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단식에 대한 질문을 받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이야기 속에서 단식의 의미가 재해서되거나 다시 가르쳐지지는 않습니다.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과 극기의 최고의 표현이라는 것에는 의미가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요한의 제자들도 그 단식을 신앙생활의 일상적인 수행으로 삼는데, 같은 하느님을 말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왜 당신들은 다르게 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는 지금이 단식의 시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식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을 거는 의지를 말합니다. 그것이 신에게 닿으면 정성이 될 수도 있고, 그 단식의 목적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지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떤 때는 자신의 수행의 도구가 되는 경우도 있어서 기도의 한 방법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에게 단식도 이러한 의미에 고정되어 있는 수행방법이요,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의 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단식을 의미가 아닌 어울리지 않는 시기의 문제로 답을 주십니다.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과 연결된 방법 중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단식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시기에는 단식의 의지에 앞서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알고 듣고 보고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먹고 마시기만'으로 보이지만 실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중이었고, 그 사이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실제 목숨을 걸고 살고 죽는 것을 경험하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느님 앞에서의 새로운 삶을 보여주는 신랑이었고 그 신랑으로 인해 참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돌아가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우리 모두는 알지만 그 때 제자들의 단식은 좀 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들에게 단식은 신랑을 잃은 슬픔의 단식일 수도 있지만,  또한 더 이상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상태, 죽음을 통한 참 단식의 의미를 배우게 된 시기일테니 그들의 단식이 지극한 정성 이상의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단식은 늘 그렇듯 자신의 정성과 극기의 상징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 부족하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단식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정성으로써의 숭고한 가치는 그대로일테니 말입니다. 또한 그 정성을 헤아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 그 자체의 의미를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을테지요.

그런 이들에게 주님처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단식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어쩌면 억지스럽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같은 목숨을 걸지만 그 방향이 전혀 다른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분명 새겨봐야 하는 문제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일방적인 정성만으로 모든 신앙을 표현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당신의 생명을 거시는 하느님을 보았고,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단식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단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신 신랑을 생각하며 우리의 단식의 시기와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분명 소중한 가르침이 되리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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