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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뭉쳐야 산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3 조회수584 추천수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제 23 주일 - 뭉쳐야 산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한 현자를 찾아와 상담을 하였습니다.

“굳이 종교모임에 꼭 나가야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혼자서 더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고, 우리에겐 양심이 있으니 그 양심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현자는 청년에게 난로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 하나를 꺼내다가 저쪽 구석에 갖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벌겋게 닳아 올랐던 석탄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빨리 석탄을 난로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꺼져갔던 석탄이 다시 벌겋게 불이 피어올랐습니다. 청년은 무언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도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든, 그러나 혼자서 안 된다면, 둘이나 셋, 혹은 교회에 알리라는 뜻은 결국 그 죄지은 사람을 회개시키려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혼자 기도하지 말고 둘 이상이 함께 기도하면 꼭 들어준다고 하시고, 당신 이름으로 둘 이상이 모인 곳에 당신도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도 세 분이시지만 한 분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본질은 여러 명이 함께 모인 곳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본질을 지닙니다.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셨을까요?

지방 소도시 시외버스 정류소. 버스는 땅콩, 바카스, 커피 등을 파는 잡상인들을 내려놓고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험상궂은 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남자는 버스 기사에게로 가고, 다른 두 명은 밍크코트를 입은 어떤 아주머니의 돈 가방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여자가 안 된다고 울부짖으며 버스 승객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들의 위협이 너무도 무서워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 하는 사람들, 창밖을 보는 사람들,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 때 검정색 작업복을 입은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백주대낮에 무엇하는 짓이냐고 그 여자를 놓아주라고 하였습니다. 세 남자는 그 청년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밍크코트 입은 아주머니도 사람들을 독려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맞으면서도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이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수적으로는 우리가 훨씬 우세합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의 공포심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아닙니까? 이런 꼴을 보고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결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결국 얼굴에 피가 터져가며 발길질을 당하는 한 청년의 희생은 잠자고 있던 사람들의 양심을 깨웠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버스 안 모든 승객이 일어났고 그들 눈에는 험상궂은 세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심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반대가 되어 세 남자가 오히려 당황하며 겁을 집어먹게 되었습니다. 버스기사는 어깨를 펴고 조금 앞에 있는 파출소 옆에 버스를 세웠습니다. 세 남자는 모두 경찰서로 끌려들어갔습니다. (참조: 조해일, 심리학자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한 청년의 희생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위로 모인 하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요한 3, 14).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높이 달렸던 구리뱀을 보고 치유를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 또한 뱀처럼 높이 들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3, 15).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요한 12, 32)

그리스도는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희생이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였을까요?

일본에서 크게 사랑을 받는 한 한국 청년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일본 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해 선로에 혼자 뛰어들어 쓰러져있는 사람을 구하려다 죽은 이수현이란 청년입니다. 일본에서는 초등하교 교과서에도 이 이름이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로 변화된 것이 있는데 이전에는 사람이 선로에 떨어져도 안타까워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사건이 있은 후로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8명 10명씩 마구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여러 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의 희생은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양심을 깨워서 그의 모범을 뒤따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한 한국 청년의 희생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마치 땅 속에 묻혀있던 씨앗들이 하나의 태양 빛으로 싹을 틔우고 꽃과 열매를 맺게 되듯이, 우리 또한 썩어 없어질 운명이었지만 그리스도의 빛으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모든 꽃과 열매들은 태양을 자신 안에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의 구심점인 그리스도를 향해 똘똘 뭉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 다 좋다고 대답하면, 그래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빠가 더 좋거나 엄마가 더 좋다면 가족은 아빠 편이나 엄마 편 둘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족은 하나가 아닙니다. 아빠와 엄마를 동시에 좋아해야 가족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구심점이 둘이 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성부, 성자, 성령 중 어느 분이 더 좋아요?”라고 물어본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시지만 결국 한 하느님이십니다. 한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을 따르는 교회도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부교회, 성자교회, 성령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이도 하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지 않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어도 바오로 교회니 아폴로 교회니 케파 교회니 하며 갈라지기도 하였지만 결국 교회의 중심은 하나여야 합니다 (1코린 1, 12). 그래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도 항상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많은 주교님들이 계시지만 그들이 한 교황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많은 사제들이 있지만 그들의 주교님은 한 분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두 주교님을 모시는 사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자는 하나여야 합니다. 목자가 여럿이라면 이 양들은 저쪽으로 또 저 양들은 이쪽으로 가면서 흩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가 되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나라도 서로 갈라져 싸우게 되면 망하고, 마귀들까지도 갈라져 싸우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교회를 위해 기도를 바칠 때 (요한 17장),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 또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가 될 때야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맨 마지막에 교회의 말까지 듣지 않으면 이방인으로 치부해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치부하라는 말은 하느님백성으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개인의 구원의 문제까지 교회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개인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 외에는 가질 수 없는 권위이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이 세운 교회에 당신의 권위를 넘겨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입니다. 하늘의 권위를 땅에 사는 베드로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권위는 구체적으로는 죄를 용서하는 권위입니다. 교회가 이방인으로 여겨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이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하는 계명이 생긴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혼자 힘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뿐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 하나의 방주에 함께 모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Pie Jesu (자비로운 예수)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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