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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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9-04 | 조회수31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1년 9월 4일 연중 제 23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죄가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도 말하고,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고 사는 것으로 달리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삶이 일방적일 수 없는 것처럼 죄라는 것도 나 혼자의 행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잘못은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면 되는 일이지만 다른 이가 나에게 잘못한 행동이 발생하면 우리는 자신의 선함만으로 삶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을 수있는 좋은 조건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자주 죄에 빠뜨리는 일은 사실 자신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른 이의 잘못들입니다. 그것에 대해 당연한 듯 보복하고 돌려주며 그나마도 받은대로 하지 않은 것 정도가 우리가 베푸는 선이라고 말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누군가가 잘못을 했을 때, 우리의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 속에 등장하는 피해자의 모습은 우리의 평소 모습과 많이 달라보입니다. 죄를 그에 해당하는 당연한 보상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나, 혹은 그 보상의 크기로 선함을 이야기하는 우리에 반해 복음 속의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구차한 모습을 보입니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어디에도 그의 잘못에 대해 갚아주라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손해를 되돌려 주거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초점은 그가 그 잘못으로부터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이 말씀들을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그의 잘못을 감추어 주라는 이야기로까지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이 혼자서, 둘이나 셋이서, 그리고 교회로 퍼져가지만 이것의 주제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듣고 돌아올 수 있는 것에 목적이 있지, 그의 죄를 밝혀 단죄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될 때 내려지는 최종 결과도 이런 면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에는 죄가 기준이 아닌 내 앞에 놓인 한 사람이 보입니다. 죄가 나에게 끼친 상처도 크지만 그로 인해 잃게 될 한 사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상처받은 이에게 이리도 혹독한 주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나고 억울하고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인지라 이 말씀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다른 민족 사람이나 어쩔 수 없는 죄를 스스로 알고도 저지르는 공개된 죄인인 세리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에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렇게 여기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 역시도 그들과 다를바가 전혀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 앞에서 우리는 절대 강자일 수 있습니다. 우리 손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힘을 사용하고, 그를 통해 죄 지은 사람 위에 서서 그를 평생 죄인처럼 다룰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이야기하는 용서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볼모로 삼고 평생 도덕적인 의인이 되어 사람 위에 서는 행동으로 자신의 선업을 자랑하는 것에 길들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서라는 좋고 사랑스런 단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의 죄를 놓고 사람을 저울질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가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그 죄를 지은 한 사람을 처음부터 잃기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네 형제가"라는 말처럼 그가 누구이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그를 타락시키지 않고, 좌절시키지 않으며, 그 죄에 갇혀 있지 못하게 하려는 눈물겨운 시도가 용서라고 예수님은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죄로써 사람을 판단하고, 용서라고 말하면서 또다른 보복을 해서 평생 죄인으로 가두어 버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권리와 권위를 세워주는 도구로 쓰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게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과 사랑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이 우리의 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매면 하느님이 우리 앞에 죄인에 대해서 맨다는 표현만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는 우리에 대해서도 매실 것이란 경고로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 함께 모여 있더라도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서로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이유 모여든 이들이 드리는 기도를 두 세 사람이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것이라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그들은 같은 단어로 같은 소리를 내더라도 시작부터 다른 이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한 형제를 잃기 싫어 그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 안에 그 시작이 되었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린 십자가의 희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한결같이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이 이 말씀을 삶으로 옮기는 열쇠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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