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 들어가는 나뭇잎만큼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간다. 문득 고개를 들어 높은 곳에 시선을 던져봤더니 하늘이 눈부시도록 푸른 빛깔로 저 만큼 높아져 있다. 이런 가을날의 피정은 항상 훌쩍 떠나가기를 꿈꾸는 나에게 놀랍도록 아름다운 가을 여행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피정(避靜)은 세상의 온갖 번거로운 일들로부터 떠나가서 생각과 기도에 정진한다는 피세정념(避世靜念)을 줄인 말이니 떠나는 계절 가을은 피정하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시간들이다.
미사를 드린 뒤 슈베르트(Schubert)와 구노(Gounod)의 AVE MARIA를 들으며 죽 한 그릇을 아침으로 먹는 동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난 영락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난 왜 이렇게 웃음을 못참는걸까? 나는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려 그들의 여행을 방해하게 될까봐 식사시간 내내 세로줄무늬 식탁포에만 눈길을 두고 오르간과 하프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였다. 난 왜 다른 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참지 못할까하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면서..... 이런 걸 분심이라고 하는 걸까?
식사가 끝난 뒤, 뒷짐을 진 채 앞마당을 산책하며 이미 먼길을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에 익은 ‘쏴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 소리였다. 경험에 의하면 바람이 없어 잔잔한 적도 부근의 밤바다는 뱃전에 부딪히며 조용한 소리를 낸다. 산책 중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바다에서의 그 소리와 너무나 흡사해서 귀에 온 신경을 쏟아 보니 그 소리는 바로 나뭇잎이 땅바닥을 구르며 내는 소리였다.
‘아! 가을의 소리였구나, 그런데 바다가 내는 소리랑 너무 비슷한걸. 내 가을 여행이 지금은 항해중인가?’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식당에 들러보니 멀리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땐 오히려 침묵하시오’라는 나의 충고가 고마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은 그에게 하는 충고가 아니라 내 자신을 향한 주문을 추신란에 낙서하듯 썼던 것이었다. 그 분의 고마워하는 마음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며 좋으신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시간, 더 깊은 침묵 속에서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주문을 내게 다시 외웠다.
오후에는 가을 산에 올랐다. 평소처럼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 단숨에 뛰어오를 기세로 몇 분을 달렸다. 저 앞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내 뛰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오늘은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 오르기로 했다. 그 작은 놈이 나무를 기어오르는데 발휘하는 뛰어난 생물학적 전문성을 보고 나니 오늘은 왠지 주위에 볼 것들이 많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천천히 산을 오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포함한 온갖 것들이 가을과 함께 어디론가 바삐 떠나가고 있었다. 나뭇잎을 흔들며 제일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이며,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들이며, 나뭇가지를 타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다람쥐며 풀 속에서 날개를 비벼가며 소리를 내는 곤충들, 모두가 이미 정해진 목적지 어딘가를 향해 떠나가는 듯 했다.
그 속에서 고개를 들어 모든 움직임을 응시하는 ‘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산길을 걷는 동안 내내 가위로 움직이는 내 발걸음을 바라보며 이 걸음의 끝, 종국에 내가 다다를 세상을 그려보았다. 아! 그리운 나라..... 하느님 나라.....
산 속의 가을밤은 빨리 찾아온다. 밤이 되어 묵주를 쥐고 수방 창을 열고 밤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 감고 손가락을 뻗치면 맨 창공을 찌르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수 많은 별들이 눈 안 가득 들어온다. 한 참을 고개 들어 바라보던 내 입에서 한 줄기 탄성이 새어나온다. 별들이 내 안으로 쏟아지는 것일까? 내가 그 별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일까? 갑자기 별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간격이 사라지고 별들과 내가 한데 어울려 시원을 알 수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이 시작된다. 그 기분이 결코 나쁘지 않은 황홀경이다. 영원으로부터 영원을 향해 계속될 것 같은 이 새로운 떠남은 무엇일까? 이 여행길을 영원히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저 익숙한 존재는 누구일까?
오늘은 이 가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쏟아진다 해도......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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