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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꺼져가는 심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5 조회수541 추천수11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3주간 화요일 - 꺼져가는 심지

 


 

오늘 한 자매가 아직 신앙이 없는 한 형제를 데리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형제는 자신의 생각이 워낙 강해서 자기의 말은 잘 듣지 않으니 신부님이 신앙에 대해 잘 좀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강한 사람은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어요.”라고 단정지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복음묵상을 하는데 그렇게 말해버린 제가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밤새 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어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 중에 정말 미스터리한 것은 가리옷 유다가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모르시고 뽑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처음부터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는 것과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시편 41, 10)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 13, 18)

예수님은 그리고 마지막 만찬 때 빵을 적셔서 유다에게 건네주시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유다임을 요한에게 알려줍니다. 유다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빵을 먹다가 그분께 발꿈치를 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도 당신을 배신할 유다를 사도로 뽑으신 것입니다. 만약 유다를 사도로 뽑으시지 않으셨다면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커다란 죄를 짓도록 뽑으신 걸까요? 예수님은 누구를 절대 죄짓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을 배신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유다를 왜 뽑으신 걸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 ‘아주 미약한 희망이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유다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구원받지 못할 마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집어먹었을 때 마귀가 그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즉 예수님께서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으시기 전까지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했습니다.

폭포를 향해 가는 배는 어느 순간이 되면 되돌아 올 수 없고 폭포 밑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거슬러 올라올 수 있습니다. 결국 폭포를 향해 스스로 질주해 가는 유다를 살려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코 유다를 이용하기 위해서 뽑으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추락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는 사람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당신 곁에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또한 매우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구원자로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벨(Alexander Bell)이 전화기를 발명하게 된 것은 처음에 청력을 거의 잃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보청기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희망이 없어 보이는 유다까지도 살리려고 노력하신 결과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있기가 꺼려지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지내기 편한 사람들만 곁에 두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 중에는 유다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겐 희망이 언제나 존재하기에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밤새 산에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힘으로 유다까지도 가슴에 품을 줄 아셨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웃, 즉 남편, 자녀, 시부모 등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어려워진다면 예수님께서 기도의 힘으로 장차 마귀가 될 유다까지도 품으실 줄 알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합시다. 사랑은 사람을 판단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슴에 품을 줄 압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2, 20-21)

 
 <이와 같은 때엔>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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