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정의 가치, 긍정의 가치[부정의 신앙, 긍정의 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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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11-09-06 | 조회수63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요즘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종종 대화하는 분이 계신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본인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느낀 점을 적는다. 인간은 자연 환경만이 아닌, 인간 환경 안에서도 살아간다. 인간의 환경이란 그 범위를 굳이 말하고자 한다면 서로 다른 삶의 상호간 관계이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환경 안에서 어떤 이들은 긍정의 가치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환경 속에서 어떤 이들은 부정의 가치로 살아가고 있슴을 볼 수 있다. 인간의 환경을 좁은 공동체의 삶이라고 규정했을 때, 먼저 '부정의 가치'로 살아가는 분에게서 느낀 점을 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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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신앙의 공동체를 평소 마음에 두고 있다. 어쩌면 자신이 바라는 신앙 공동체의 모습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같은 분명한 모습 속에서 다른 모습들이 보여지면 그 자신은 현실의 공동체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곤 한다. 신앙인이라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처음의 여러차례는 공감해 주기도 했다. 무작정 맞짱꾸로 받아 준것은 아니다. 항상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심은 그런 환경에서 지배당하지 말 것을 말해주었다. 흔들리지 말고 도리어 그 분이 그 공동체에서 조용한 빛의 역할이 되어주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심히 낙담하고 돌아선다면 하나의 빛이 꺼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또 다른 한 사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자신도 말하기를 그와 이야기하면 그 말이 맞고 나하고 이야기하면 또 이 이야기도 맞는 말이기 때문에 참으로 무엇이 맞는 말인지 헷갈린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하였다. 그가 이야기를 나누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종종 대화를 나누는 이 분보다 훨씬 더 아주 부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자신의 신앙'으로 사는 분이다.
자신이 부정적으로 환경을 보게되면 아주 부정적인 또 다른 그분에게서 자신의 뜻을 인정받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부정의 가치'를 가진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 마음이 통하였다가도 나와 함께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되면 그게 아니다는 부분도 또한 알게 되니 그로서는 햇갈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 공동체에서 떠나고 만다. 그가 '자신의 신앙'으로 더이상 공동체 환경을 묵과할 수 없다는 내적 갈등이 이제 마침의 작용을 하고 말았다고 할 것이다. 떠나는 그에게서 엉뚱한 이야기를 듣는다. 즉, 그가 경험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신앙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위로하려고 내뱉는 소리인 것을 안다. 그가 떠나는 마음에서도 자신이 본 공동체에 대한 그동안 보여지지 않고 숨겨진 '증오심'을 나타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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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에게 다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해 주었다. '부정의 가치'는 참 가치가 아니다. 모든 사물(환경)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기만 한고 만다면 그것은 가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서만 발견하지 말고 문제가 극복되어질 때,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는 것이다. 문제의 비관적인 낙담을 주기 보다는 극복하여 감동을 주는 '긍정의 가치'가 될 때 참 가치가 되어지는 것이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문제점만을 꺼집어 내어 글을 쓴다면 사람들에게는 피곤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 문제를 꺼집어 내는 것은 그 문제에다 더 문제로 증가시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이미 알고있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감동 보다는 짜증나도록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의 가치'는 부정이 긍정을 이룰 때, 부정으로서의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부정의 가치'라 규정 지을 수 있으며 만일 부정이 부정에만 머물고 극복하는 상태가 없어서 감동이 없는 부정 그 자체라면 도무지 '가치'라고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그때 '부정의 가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신앙(자신의 신앙)을 알고 간다고 말한다. 물론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 다시 돌아 온다고도 또한 그는 말한다. 자기 자신이 말하는 그대로 자신은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의 신앙'이 마치 목적에 도달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그에게 그같은 신앙의 상태라면 어디를 가더라도 문제만 보고 문제를 극복하려는 긍정의 참 가치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문제만으로 자기 생각을 다 채운 신앙은 울분과 미움의 증오심이 그 마음 안에서 끊이지 않는다.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있지만 문제를 극복하면서 긍정의 신앙으로 사는 이들에게서는 변명될 수 없는 틀림없는 사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의 인간 환경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해서 바라 본 사람 그 자신이 인간의 모순적인 신앙을 알았다고 확신하는 '자신의 신앙'으로 인간에 대한 미움과 울분이 쌓였다면 그런 신앙은 결단코 신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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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앙' 안에서 문제를 지적하면 대중들에게서 눈길을 집중시킬 수 있지만 '신앙의 감동'은 줄 수 없다. 신앙의 감동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고통 때문에 사랑을 배우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간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이처럼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와서 사랑으로 고통을 안고 가는 (고통에 결합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현실의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고통 때문에 미움과 울분의 증오심이 얼굴에서 피눈물로 (투사되어) 흘러 내리는 게 아닌 것이다.
'자신의 신앙'은 '하느님의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고통 속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고통과 결합하여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랑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사랑에 대한 증오감으로 '자신의 신앙'을 이룬 게 인간의 참 양심은 아니며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참 신앙도 아니다 하겠다.
문제의 부정으로만 마음에 가득 쌓여 '부정'을 인간 정신의 가치로 삼아 그리스도적인 고통(사랑의 고통)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인간 자체를 도리어 파괴시키고 만다. '자신의 신앙'이 절대의 선이라고 철저히 확신하는 극도의 이성은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게 위험하다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겉으로는 선을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악을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을 인간 내면 속으로 퍼뜨리는 것이기에 위험한 것이다.
인간 안에 깊숙히 뿌리내려진 '악의 영향'은 하느님의 신앙, 곧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걷어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인간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의 사랑'이다. 인간의 환경을 비관하는 게 아니라 그 인간 환경을 속에서부터 극복해야 하는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겸손한 영혼들의
기도에서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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