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무엇인가?
① 용서란 첫째, 깨어 있는 자의 용기 있는
행위다.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보다 상대방을
참아주는 것이 더 이롭다는 것을 안다.
용서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증오의 독이 점점
녹아내려 새로운 사람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용서하는 사람은 악의 울타리를 부수고 고립된
상대방을 구해 내는 것이다.
② 용서는 자유의 행위다. 곧 자유로운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악에
물들지 않는다. 그는 거절을 거절로써, 사기를
사기로써, 살인을 살인으로써 앙갚음하지 않고
용서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이룬다.
예수님은 자유로우셨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자들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으셨다. 살인자나 고문자에게
똑같은 살인자 또는 고문자로서가 아니라 용서를
통해 증오를 이기고 승리하셨다.
폭력은 증오의 논리를 깨뜨릴 수 없다. 오히려
증오를 정당화할 뿐이다. 그와 반대되는 행위,
곧 박해당한 이들의 용서만이 증오의 논리를 이겨
낼 수 있다.
용서는 창조적 자유 행위다. 용서가 이루어질 때
죄인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긍정적 걸음을
시작하게 된다.
③ 용서는 구체적이다. 그 사형수만이 자신의 사형
집행인을 용서할 수 있고, 미움의 대상이었던 자만이
그 미움의 무기력함을 보여줄 수 있다.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의 용서가 자신이 미워하던
사람에게 새 역사를 열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무력해 보이는 용서 행위를 한다.
만일 하느님이 자신을 희생자와 동일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사형 집행인들을 용서하려 했다면 이 용서
는 비현실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러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못 박는 이들에게 죽어가면서도 용서를 선사
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매우 구체적이다. 희생당하는
그 당사자의 용서인 까닭이다.
그분은 매 맞고 조롱받고 부당한 폭력에 짓밟히고
범죄자처럼 고문당했으나 죽기까지 용서를 베푸셨다.
미움의 파괴적 양상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부수어 버린 것이다.
④ 용서는 그에 걸맞은 미래를 열어준다.
성경이 죽음을 죄와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 바로
모든 것을 차단하는 주범이고, 무엇보다 공동체로부터
의 전적인 단절을 뜻하기 때문이다.
미움의 포로가 된 이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미움의 의지는 오로지 용서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용서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공동체의 미래를 열어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적을 없애기 위해 하느님의
힘을 청하기를 거부하셨다.(마태26,52-54참조)
그로써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폭력의 사용은 사탄의
행위임을 알게하셨다.
예수께서는 죽으시면서도 사형 집행인들을 용서하셨다.
예수께는 상대방의 파멸이 아니라 회개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목표는 저주받은 자와 구원된 자 사이의
영원한 이원주의가 아니라, 공동 미래를 지향하는 모든
이의 화해다. 이는 훨씬 어렵지만 자랑스런 일이다.
“고통이라는 걸림돌”
오늘의 묵상 :
용서는 참으로 힘든 것이기에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하려는 생각을 아예 버리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을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