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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항상 내 옆에 계신 주님![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7 조회수1,539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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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의 계절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배티성지 아름답죠?

이제 더 아름다워지겠지요.!

 

6년 전에 배가 남산만한 어느 자매가 낳을 다리 얼마 안 된 아이가

신부님에게서 이 아이의 이름을 받아내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잘 아는 한자가 제 이름이라서

이름은 수컷 웅(雄)자 매울 열(烈)로 해라!

세례명은 나와 같은 토마스 아퀴나스 라고 해라!

그런데 그 다음부터 문제예요.

내가 그 동네 갈 때마다 그 아이가 내 앞에 나타나는데~

며칠 전에도 그곳에 갔더니 그 아이 부모가 내 앞에서

“이놈 웅열아, 떠들지 마라!”

레지오 단원들이 그 아이를 삐~잉 둘러싸고

“웅열이 이놈아, 저놈아~”

하는데 내가 책 싸인 하면서 열 받았어~

속으로 ‘6년 전에 내 이름으로 지어준 게 결정적인 실수구나!’

 

제가 90년대 초반에 중국선교를 다녔는데 여기 앉은 요한 신부님이

그때 신학생이어서 통역도 해주고 그랬어요.

 

한족에게도 제가 피정을 했는데 회장님이 통역을 하던가 신학생들이 통역을 했어요.

중국 사람들이 사는 소팔가자라는 곳을 마차를 타고 터덜터덜 갔더니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200년 된 성당이 하나 있었어요.

본당 회장님이 30분을 종을 ‘댕~댕~’ 치니까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 밭에서

개미처럼 사람들이 꼬물꼬물 나오는데 순식간에 성당마당에 한 오백 명이 모여 들었어요.

그 동네전체가 천주교신자에요.

 

깡통 안에 솜을 넣어서 성수를 찍고, 성작이 없어서

이가 빠진 사발에다 미사를 드리고 있었어요.

 

“김대건신부 추모 현양 묵상회”

라는 타이틀을 걸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신부가

중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그곳에 잠시 계셨는데 그분이

한국사제로서 성인이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 이름 가운데 드문드문 이름이 대건이가 있었어요.

 

5년 있다가 봉사자들을 데리고 한 번 갔더니 소팔가자 회장님이 저를 알아보고

조선족 통역하는 한 분이 4~5살 된 아이들 몇을 데리고 왔는데 이름이 ‘웅열’ 이래요.

5년 전에 신부님께서 피정 다녀가신 뒤에 태어난 아이들 중에 웅열이가 많대요.

지금도 중국에 가보면 웅열이가 판을 치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이름에 따라서 운명이 많이 좌우됩니다.

춘천에 있는 그 웅열이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죽고 나면 두 번째 웅열이가 춘천교구에서 사제로 활동을 하겠지요.

또 소팔가자에도 있는 웅열이라는 사제가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피정에 갔는데

점심시간에 울산공대 교수가 와서 이야기하기를

신부님, 제가 몇 년 동안 연구를 했습니다. 사제를 만들려고 결심을 했다면

반드시 두 자 가운데 하나는 ”웅“자가 들어가야 큰 사제가 됩니다.

한국에는 삼 신부가 계십니다.

김웅열신부님, 강길웅신부님, 오웅진신부님

그래서 큰 사제가 되려면 반드시 웅자가 들어가야 합니다.

 

이름은 내 일생과 같이 항상 따라 다니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이름에 대한 존귀함을 모를 때가 있어요.

 

부활이 몇 주 지나고 있는데 승천대축일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셨어요?

부활하기 까지도 힘들지만 부활을 지켜나가기도 대단히 힘이 듭니다.

 

승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꼴을 찾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예요.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 귀향, 곧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하면 구름타고 올라가느냐~

손오공처럼 올라가셨을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럽게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은 자기 꼴을 찾아가고 있느냐?

 

예수님 부활 후에 복음서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하고 있지요.

 

첫 번째는 빈 무덤위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는 어찌 보면 자기 꼴을 찾는 우리들의 승천과

승천대축일과도 깊은 의미가 있기에 다시 한 번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 중에 제자 몇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가는데

그때 예수님이 옆에서 서서 갑니다.

무려 삼십 리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겁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못 보게 했을까요?

첫 번째는 죽음으로부터의 두려움입니다.

내 우두머리, 예수님을 죽었다면 분명히 그 부하들도 찾아서 죽일 것이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스승을 못 보게 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들은 죽음을 생각하면 괴롭기 때문에 안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자고 일어날 때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은 이 자리에 있지만 다음 달에 이 자리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년 6월에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의미의 사형수들입니다.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못 볼 때가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깊은 터널을 지나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저 사람 쫓아다니면 한 자리 할 줄 알았는데

3년 동안 저 인간 쫓아다니다가 쫄딱 망했구나!

3년을 어디서 보상 받고 앞으로 나는 뭐 먹고 살아야 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예수님을 못 보게 한 겁니다.

 

세 번째 원인은 상실감입니다.

 

네 번째 원인은 미움입니다.

 

기대가 미움으로 변할 때 분노가 찾아옵니다.

기대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 예수님이 옆에 서 있어도 못 봅니다.

24시간 미움으로 들끓는 사람은 예수님이 나타나고

성모님이 그 사람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도 뿌리칠 겁니다.

 

제자들은 3시간여를 같이 걸었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

분노 때문에 ~

주님을 못 본 겁니다.

 

우리도 늘 투정을 합니다.

 내가 힘들 때 당신 어디 계셨냐~

주님은 항상 내 옆에 계셨는데도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앞에 이야기 한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었는데 산비탈을 걸을 때는

자기 발자국 밖에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내가 힘들 때 당신 어디 계셨냐!”

당신이 무슨 자비의 인간이냐~고

“이놈아, 니가 산위에 올라갈 때는 내가 너를 업어서 날랐다!“

 

우리는 늘 예수님이 내 옆에 없다고 투정합니다.

이 힘든 길 이 십자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다고 투정합니다.

상실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기대감이 못 미칠 때 따라오는 분노!

이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하느님 못 봅니다.

세례 받고 4~50년 동안 내 곁에 계셨는데도~

성체를 영할 때마다 내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셔도 우리는 보지 못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당신에 관한 성서말씀을 설명하실 때

눈이 하나씩하나씩 열립니다.

 

교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당나귀같이 어리석고 고집 센 나를 쓰시겠다고 그러십니다.

세례 받은 그 순간부터 내가 너를 쓰겠노라!

너밖에 모르는 너지만 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겠다고 하십니다.

 

성서는 마음으로, 심령으로 읽어야 합니다.

 

저는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도 마음으로 읽고, 심령으로 찍을 때는 감동이 오지만

내 기술을 가지고 찍으려고 할 때에는 현상해 보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성서전문가들이지만 지식으로 읽었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글씨를 모르는 어느 할머니가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처음에는 빨간 종이를 올리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시고

까만 종이를 올리시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겁니다.

흰 종이를 보시며 함박 웃음을 웃으셨습니다.

 

본당신부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왜 그렇게 하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까막눈이라 성서를 읽을 수 없어요. 제 나름대로 빨간 종이를 보며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까만 종이를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흰 종이를 보면 부활을 생각합니다.“

본당신부님을 무릎을 치면서 이게 바로 심령으로 하느님을 믿는구나!

 

하느님은 어리지만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체 영할 때 한 마디만 하세요‘

“주님,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아멘

 

 

 

느티나무신부님(2011. 06. 04 배티 은총의 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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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성지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성가 -  주는 나의 목자시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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