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감히 무엄하게도 주님 말씀에 토를 단다면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있고,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눈의 티는 잘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마라톤 연습을 남산에서 하는데
제가 연습하는 그 시간에 눈먼 분들이 많이 산책을 하십니다.
누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그분들끼리 산책을 하는데
눈먼 분이 눈먼 분을 인도합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지만
남의 눈의 티는 잘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죄를 보면 남의 죄를 보지 않겠지만
자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의 죄를 보고,
자기 죄를 작게 하기 위해 남을 죄를 크게 보는 사람은
자기 죄는 커도 못 보고 남의 죄는 작아도 잘 봅니다.
그러니 남의 죄를 보는 것은
자기 죄가 커도 잘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고치게 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더 큰 죄는 고치지 않으면서
남의 작은 죄를 고치라고 하니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요,
고친 경험이 없으니
고친 것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할 수 없고,
고치는 법을 모르니
고치는 법을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산에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것은
눈이 멀었어도 가는 길을 먼저 터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터득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애를 먹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회개에로 인도하려면
자신이 먼저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만일 더 큰 죄인이 회개를 하기만 하면
누구보다 다른 사람을 회개에로 더 잘 이끌 것입니다.
이는 마치 조직 폭력배였던 이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과거의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 삶을 살 때 더 큰 간증이 되듯
더 큰 죄인이 회개하여
회개의 기쁨을 얘기하면 더 잘 믿을 것이고,
더 큰 죄인이 회개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감동을 줄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였기에
회개의 이치를 잘 알고 잘 설명할 겁니다.
왜냐면 우리 안에는
죄에 대한 패배주의가 나름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몇 십 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노력을 했는데도 안 고쳐졌기에
고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큰 죄인이 그 죄를 고친다면
회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시작할 용기를 줄 것입니다.
문제는 보기 싫은 자기 죄를 보는 것이요,
내가 더 큰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고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죄인이 내가
더 훌륭한 회개의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더 큰 죄인들이여,
회개의 인도자들이 됩시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