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4주일 2011년 9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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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9-09 | 조회수42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24주일 2011년 9월 11일
마태 18, 21-35.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에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가르칩니다. 먼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은 너무 많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은 어렵게 용서하지만, 두 번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일곱 번까지’라는 베드로의 물음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까지 하라는 말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7×70=490 번, 곧 한없이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비유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일만 탈란트를 빚진 종이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자, 그 주인은 그를 가엾이 여겨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그를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일만 탈란트에 대한 용서가 취소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일 탈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일만 탈란트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용서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이라는 적은 액수의 빚을 용서하지 않았다가 먼저 받았던 혜택마저 취소되는 큰 불행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고, 사람들의 잘못에 복수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세상의 심술궂은, 높은 권력자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내는 데에 필요한 절차들을 만들었습니다. 죄인이 지켜야 하는 율법도 만들고, 바쳐야 하는 제물 봉헌 절차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상상하여 하느님을 만들었더니, 그 하느님은 이세상의 심술궂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사람은 율사가 시키는 대로 정해진 율법을 지켜야 하고, 사제들이 지시하는 대로 제물도 바쳐야 합니다. 여기 돋보이는 것은 율사와 사제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믿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데 고해성사를 통해서만 용서하신다고, 믿고 있지나 않는지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과연 베푸시는 분, 은혜로우신 분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입니다.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인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흘러서 세상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우리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그 자비를 우리가 차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일만 탈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 자비를 자기 선에서 차단해버렸습니다. 그 자비가 자기의 주변으로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비롭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때, 인간다운 희열과 행복을 맛봅니다. 대단히 제한되고 단편적이지만, 우리는 그런 희열과 행복을 가끔 체험합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돌보면서 느끼는 희열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릴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사랑도 자비도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미움과 복수가 지배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미워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한 나머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이 된 것은 우리도 그 사랑과 자비의 흐름 안에 합류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내 이웃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자유로운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흐름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우리가 자유로울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시키는 대로 하는 마음은 사랑도 자비도 모릅니다. 자비와 사랑의 실천도 우리가 자유로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이 군림하였을 때, 이스라엘 안에 사랑과 자비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도 사랑과 자비는 모르고, 그냥 지킬 것, 바칠 것만 요구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은폐되면서 하느님은 무서운 존재가 되었고, 율사와 사제들은 그 후광을 입어 행세하며 재물이나 욕심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격언은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탈출 33, 19)이라는 모세의 깨달음을 기초로 한 이스라엘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을 살아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여, 이웃을 섬기고 용서하며 살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저항을 받고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기에, 그분은 죽음을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과연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사랑과 자비 안에 자기 생명의 기원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와 사랑이 자기의 주변으로 흐르도록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율사와 사제가 행세하고 명령하였을 때,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은폐되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사람이 행세하면, 사랑과 자비는 사라집니다. 신앙은 성직자들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자유를 배우는 신앙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것을 원하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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