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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11일 야곱의 우물- 마태18,21-35/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1 조회수317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21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형제의 잘못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용서는 사랑의 시작이며, 공동체 유대의 기초가 됩니다. 용서를 모르거나 용서에 인색한 공동체는 구성원 간의 유대가 점차 약화되어 결국 공동체 와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고, 형제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18,15­20)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무한한 용서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15ㄱ절)에서 전제하는 것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형제라면, 21ㄱ절은 용서를 청하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용서를 청한다 해도 공동체 생활의 실천적 필요성에 의해 용서의 빈도에 한계를 정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는지 완전한 숫자를 들어 “일곱 번까지”(21ㄴ절)라면 충분한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가 아니라 형제가 회개하기만 한다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22절)한다면서 끝없는 용서를 강조하십니다.
무한한 용서는 하늘나라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이는 공동체 설교의 첫 주제로 ‘어린이처럼 되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들어가는 하늘나라와 상통합니다.(1절,3­5절) 그러면 용서는 하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는 하늘나라는 종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23절) 우선 ‘임금과 종’은 신분상 주종관계에 있습니다. 더욱이 임금에게 빚진 만 탈렌트는 종이 ‘자신과 아내, 자식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4­25절)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 한 탈렌트는 6,000드라크마이며, 한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로 한 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은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20,2 참조) 종은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26절) 하고 간청하지만, 기다려 준다고 해서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닌 비현실적인 약속입니다. 이런 종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본 주인은 다만 기다려 달라는 종의 청원에 놀랍게도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는 자비로 응답합니다.(27절) 결국 하늘나라의 열쇠는 빚을 갚는 데 있지 않고 임금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33절)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28ㄱ절) 그 종은 동료를 붙잡아 멱살을 잡으며 “빚진 것을 갚으라.”고 호통을 칩니다.(28ㄴ절) 그 종이 주인에게 간청했을 때와 같은 자세로 그의 동료도 엎드려서 말미를 청하지만, “들어주려 하지 않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29­30절) 만 탈렌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은 소액이며, 기다려 준다면 갚을 수도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를 옥에 가두어 가족이나 친지가 대신 갚아주면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 종의 마음에는 동료에 대한 인은(仁恩)과 자신이 받은 자비에 대한 감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다른 동료들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러주자”(31절)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했습니다.(34절) 매정한 종은 자비를 입기만 했지 베풀 줄을 몰랐기에 단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랑과 겸허로 얻을 수 있었던 하늘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1­5절 참조)
 
무한한 용서의 근거(22절)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33절)는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루카 7,47 참조) 제1독서도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집회 28,4; 마태 6,12.14­15 참조) 하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마태오는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마태 18,35)이라는 말씀으로 공동체 설교를 끝맺습니다. 이는 우리도 형제들을 받아들여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권고일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18,4­5 참조)

묵상(Meditatio)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33절)는 절대적인 권고 앞에서 저는 늘 ‘그럴 수 있지.’와 ‘그럴 수 없지.’를 놓고 용서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을 때, 용서는 저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기원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죄가 우리 자신을 묶는 것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도 저를 묶었습니다. 용서는 묶인 마음을 풀어 자유를 얻게 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이웃에게 생명을 건네는 선물이 됩니다. 제가 용서받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요. 오늘은 용서하지 못하고 제 마음에 가두어 두었던 이웃에게 제 것이 아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하고 싶습니다.

기도(Oratio)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4)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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