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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가] 2011091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1 조회수30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11일 연중 제 24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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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한다면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오늘 복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쭤봤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을 얻기 전에 이 생각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죄를 기준으로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형제든 누구든 나에게 잘못을 하면 나는 그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해 줄수도 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했으니 잘못한 것으로 그는 죄인이 되고 나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아도 그보다는 나은 의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권리도 생기고 그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됩니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하나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높은 자리에 서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많은 권리를 위에서 죄인인 상대방을 바라보게 됩니다. 용서는 나의 권리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갯수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고민이 행복한 고민은 아닙니다. 피해를 입었으니 당연히 화가 나고 보복이 당연한 권리가 되어 있는 상황이기에 이렇게 한 발 뒤에서 정리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이가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옳은지 베드로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간단하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상상치도 못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고민도 없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용서가 권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에 그 용서는 자동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듯 예수님은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용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우리에게 이 말씀은 듣기에는 너무 좋은 가르침이지만 헤아릴 수 없는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용서를 했다 말하면서도 용서할 수 있는 권리 위에 여전히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번 잘못한 사람은 내가 용서라는 과정으로 그에게 죄를 풀어 주었다 하더라도 평생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를 판단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것이 어떤 잘못이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를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른다면 피해를 입은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위해주는 것처럼 여겨지고 오히려 그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꼴이 되고 맙니다. 무조건 용서이니 잘못을 방조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갚음을 받아야 하고 그 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는 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는 것이라는 설명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게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건네신 이야기는 직접적으로는 우리가 왜 용서를 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감당할 수도 없는 죄들을 용서라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 주고 받고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아니 자기 나름대로는 올바른 정의를 실천하는 종에게 임금은 그 종의 사정과 그의 마음을 헤아렸던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그 와중에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는 마음 하나에 그 숱한 죄를 용서해주었는데, 그는 탕감받고 나선 길에서 그에게 빚을 진 이를 용서없이 처벌하는 모습에 화가 난 임금의 이야기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임금은 종에게 용서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었으나 그는 그의 동료에게 용서가 아닌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처벌하고 그의 몫을 되받으려 시도했기 때문에 화가 난 임금의 이 설명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를 따라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야기 속의 임금이 종을 용서한 까닭은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종을 사랑하고 그 종이 사랑하는 삶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깨달음이 없는 이에게 용서의 근본을 생각하고 깨닫기를 바라는 가르침이지 단순하게 나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지라는 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우리에게 피해를 준 이까지 마땅히 용서하는 것은 세상과 사람을 헤아리고 사랑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용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 말입니다. 그 용서가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우리의 반성과 눈물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 떨고 갚을 길이 없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그분의 마음에서 용서가 옵니다. 용서는 거래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행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숱하게 많은 용서할 일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용서라는 단어 위에서 사람 위에 서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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