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9.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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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9-11 | 조회수37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9.11 연중 제24주일 집회27,30-28,7 로마14,7-9 마태18,21-35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말씀 묵상 후 새벽 성무일도 중 수도형제들과 함께 힘차게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문득 떠오른 이등변 삼각형이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나와 너의 점을 잇는 직선뿐이라면 참 단조롭고 따분한 삶일 것입니다. 깊이와 넓이, 높이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나와 너 위에 하느님이 있어, 나와 너를 잇는 선에다 나와 하느님을, 너와 하느님을 잇는 선으로 인해 이등변 삼각형의 꼴이 형성되고 비로소 우리 삶은 사랑의 넓이와 깊이, 높이를 지닌 산(山) 같은 삶이 됩니다.
바로 성당 제대 뒷면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너와 내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룰 때 비로소 나와 너의 일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마치 이등변 삼각형의 꼭짓점의 중심에 자리하신 자비의 하느님 같고 이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 목표입니다.
산상설교를 끝내며 하신 주님의 결론 같은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강론 제목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삶이 될 수 있을까 그 묵상을 나눕니다.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을 찬미할 때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찬미입니다. 평생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은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의 응답을 드리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 찬미 감사 전례기도는 말 그대로 ‘찬미의 용광로’입니다. 질투, 분노, 복수심, 우울, 슬픔, 불안, 두려움 등 온갖 마음의 불순물을 정화하여 순수한 사랑으로 변모시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사랑의 표현이 찬미입니다. 서로 이등변 삼각형의 꼭짓점 중심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함께 주님을 찬미할 때 서로간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우리 삶도 서서히 사랑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존재 자체가 사랑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중심을 묻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웬 지 공허합니다.
이들 넘어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자리 잡아야 비로소 충만한 삶입니다. ‘주님을 위하여’가 마르지 않는 선행의 원동력이자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의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주님을 위하여’의 삶이 생사를 넘어 영원한 삶을, 모두에 대해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가 우리의 삶은 바로 주님을 위하여의 삶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은 용서입니다. 하느님다운 사랑이 용서의 사랑입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용서의 여정입니다. 회개하여 용서이기보다는 용서할 때 사랑에 감동하여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아 그럴 수 있지’ ‘그게 현실이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대한 용서가 상대방의 마음 문을 열어 회개로 이끕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끝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이 무한한 자비를, 용서를 잊어서 문제입니다.
복음의 만 탤런트 탕감 받은 이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사랑의 빚을, 은총을 깨달았더라면 결코 백 데나리온 빚진 이에게 그렇게 무자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은혜를 깨닫지 못해 무자비하고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래서 미사 중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수없이 자비 송을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살고 있는 우리 존재임을 절실히 깨달아야 이웃에게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아무도 용서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많은 죄 중에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이 용서의 은혜가 마르지 않는 용서의 샘이 되어 이웃을 용서하게 합니다. 주님의 용서가 이웃을 용서하게 하고 이웃을 용서할 때 주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집회서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주님의 끝없는 용서를 받기에 이웃을 끝없이 용서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용서가 자연스런 일상의 삶이 되어갈 때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죽음의 종말을 생각하십시오.
죽음의 종말을 묵상할 때 온갖 환상은 걷히고 본질적인 것만 들어납니다. 언젠가 사라질 약하고 병든 동료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샘솟듯 일어납니다.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을 결코 불신, 미움, 절망으로 낭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죽음 앞에서 환상의 거품은 걷히고 말 그대로 순수해 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하여 사막수도자들은 물론 분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하셨습니다.
죽음의 종말을 묵상할 때 환상의 안개들은 다 걷히고 또렷이 들어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랑이 우리를 자비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끊임없는 찬미의 사람이 바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끊임없는 용서의 사람이 바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죽음의 종말을 묵상하십시오. 온갖 삶의 환상이 걷힐 때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바로 너그럽고 넉넉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매일 주님의 이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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