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 선생님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할 때 나눠주신 소감에 다음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고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물론 소설 내용에도 아들을 잃은 어느 어머니가 넋두리를 하지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에 치매 상태가 된 친구 아들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라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을 지나시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이지요. 상복을 입은 여인한테서 성모님의 모습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또 숨을 거둔 자신을 품에 안으실 성모님을 말입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어머니의 슬픔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비애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지만 젊은이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자식이 배고플 때 ‘내가 밥이다.’라고 주시는 어머니처럼 군중의 배고픔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 14,14) 빵을 많게 하셨고, 자식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니 이를 보고 또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살리십니다.
부모님께서 저세상에 가시면 자식은 부모님을 흙 속에 묻지만 자식이 당신들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면 부모님은 자식을 가슴에 묻지요. 예수님은 더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몸소 지셨고 그 위에서 몸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해 가지신 ‘가엾은 마음’은 ‘형벌(刑罰)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마음과 사랑 때문에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에 그렇습니다.
박기석 신부(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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